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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GO매거진]유전자 이데올로기

입력 | 2001-05-09 12:37:00


인간게놈프로젝트 결과가 발표되었다.

예상보다 유전자 개수가 적다는 사실 때문에 과학자들은 놀라기도 했고, 셀레라 지노믹스사라는 사기업이 10여개 국가에 의해서 구성된 인간게놈프로젝트 컨소시엄에 비견되는 과학적 성취를 이룬 점을 두고도 말들이 많다.

과학기술에 어두운 일반 시민들은 TV 방송국의 화려한 그래픽을 배경으로, 혹은 신문사들의 특집기사를 통해서 인간의 유전자 지도가 해석되면 맞이하게 될 장미빛 그림에 세뇌되고 있다.

기적의 신약이 개발되고 인간은 200살·아니 그 이상으로 장수할 것이며, 유전병들은 영원히 사라질 것이라는 장미빛 그림.

▼유전자란 무엇인가 ▼

그렇다면 대체 '유전자'란 무엇인가? 유전자 분야의 연구는 너무나 빨리 발전을 해서 대학 교재 내용이 해마다 바뀔 정도라고 한다.

그래도 중·고등학교 때의 생물학 공부를 한번 기억해보기로 하자. 미생물이든, 식물·동물 그리고 존엄한 인간마저도 똑같이 '세포'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진핵 세포에는 핵이라는 세포기관이 있고, 핵에는 염색체가 담겨져 있고 여기에 유전자가 있다.

과학자들은 인간게놈프로젝트 결과가 발표되기 전에는 10만여개의 유전자가 있다고 생각했다. 유전자는 DNA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것들이 RNA로 바뀌고 다시 단백질을 만들어서 인간의 신체 구조 및 생명 활동을 결정한다고 생각했다.

치명적인 유전질환부터 유방암 등과 같은 각종 질병·노화 등도 이에 해당하는 유전자가 있어서 결정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공격성·성범죄 등과 같은 사회행동적인 측면을 비롯하여 지능·우울증 등과 광범위한 인성까지도 유전자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은 성적인 결합을 통해서 후손에게 대물림된다는 것이다.

▼사회경제적인 문제를 유전적인 문제로 돌려 ▼

그러나 2월에 발표된 인간게놈프로젝트의 결과에 따르면 인간의 유전자가 2∼3만개에 불과하다는 점이 밝혀졌기 때문에, 인간의 신체 구조물·인간의 생명활동·사회행동적인 측면 모두를 유

전자가 결정한다는 소위 '유전자결정론'은 더 이상 성립되기 어렵게 되었다.

환경적 영향·유전자들 사이의 상호작용이 대단히 중요하다는 점이 밝혀진 것이다. 따라서 인간을 비롯하여 인간 사회를 유전자로 환원시켜서 설명하려는, 결국은 사회경제 구조적인 문제를 개인적인 책임으로 돌리려는 '유전자 이데올로기'가 아무런 과학적 근거가 없다는 점이 드러난 것이다.

하지만 유전자 결정론의 파산이 인간 신체나 생명활동이 유전자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대개 확률적인 가능성으로 표현되기는 하지만 특정한 질병을 비롯하여 다양한 형질과 관련된 것으로 여겨지는 유전자들이 발견되고 있다.

현재 1000여개의 유전자가 발견되었다고 알려지고 있으며 앞으로 연구에 따라 발견돼 이용가능한 유전자수는 계속 증가할 것이다.

이에 따라 개인별로 유전자의 이상 유무를 진단할 수 있는 유전자진단 혹은 유전자검사가 이미 시작되고 있으며 폭넓게 확대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염색체 이상에 의한 유전병 진단이나 XY염색체 유무로 판단하는 성별 검사에서부터 요즘은 유방암 진단과 같은 질병 유전자 검

사, 그리고 지능·호기심·체력·우울증 등에 대한 유전자검사까지도 실시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유전자검사의 과학적 근거는 아직 모호하다. 암과 같은 질병의 확진을 위해서 이용되는 유전자검사에 대해서는 임상적으로 이용될 정도가 되지만 그 외의 검사들에 대해서는 아직도 논란이 거듭되고 있다.

특히 지능·호기심·체력·우울증 등의 소위 인성에 대한 유전자검사에 대해서는 더욱 그렇다.

▼바이오벤처, 학습지회사와 결혼정보회사 등과 제휴 ▼

최근 국내에서 몇몇 바이오벤처들이 학습지회사나 결혼정보회사들과 제휴하면서, 지능이나 알코올중독 등에 대한 유전자검사를 한다고 광고를 하고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 일부 과학자나 의사들은 한마디로 '사기'라고 비난할 정도다. 유전자에 대한 맹신과 자녀에 대한 왜곡된 교육열, 천박한 결혼관에 기댄 일부 바이오벤처들의 돈벌이 사업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과학적 근거가 모호한 검사를 통해서 분석된 유전정보를 비롯해서, 검증된 유전자검사를 통해서 밝혀진 유전정보가 다양한 목적으로 사용되거나 계획되고 있는 상황이다.

예를 들어서 보험·고용 및 범죄수사 목적으로 사용되는 것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유전정보는 신상·금융거래 정보와 같은 일반적인 개인정보와는 다른 특정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유전정보는 혈액·머리카락 등과 같은 유전자샘플을 채취해서 분석을 하는데, 적은 양의 샘플을 가지고도 다양한 검사를 통해서 엄청난 유전정보를 얻어낼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분석된 유전정보 이외에도 유전자샘플의 관리가 대단히 중요하다.

두번째 특징은 유전정보는 자신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타인에 의해서 분석되어 이용될 가능성이 많다는 것이다. 무심코 흘린 머리카락에서 개인 유전정보를 알아낸다는 영화 '가타카'의 내용은 미래의 일이 아니다.

세번째 특징은 한 개인의 유전정보는 그 개인의 것만이 아니라는 점이다. 자신과 혈족 관계를 가지고 있는 부모·형제 등과도 많은 유전정보를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유전정보는 어떤 상황(예를 들어서 질병 발병)과 상관관계를 보여주는 가능성 정도일 뿐이라는 것이다.

▼미국은 유전자검사를 통해 차별이 진행되고 있다 ▼

이에 따라서 유전정보의 이용은 불합리한 사회적 차별을 가지고 올 가능성이 대단히 높다. 예를 들어 보험회사는 질병과 연관된 것으로 여겨지는 유전자를 가지고 있다는 점을 들어서, 해당인

의 보험료를 인상하거나 보험 가입을 거부할 수 있다.

또한 입사시 유전자검사를 필수조건으로 하여 이를 거부하거나 혹은 유전자검사 결과 특정 질병 관련 유전자가 있다는 점을 들어서 고용을 거부할 수도 있다.

또한 비슷한 이유로 해고를 시도할 가능성도 있다. 이에 대해서는 미국의 구체적인 통계가 있는데, 1997년에 이미 고용주 6∼10%가 유전자검사를 진행하였으며 1996년에는 미국 노동자들이 자신의 유전병 발병 가능성에 의해서 차별을 받았다는 보고가 있다.

그런데 앞서 지적처럼 질병 관련 유전자를 가지고 있다고 해서 질병이 반드시 발병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들어서 이것은 불합리한 차별이며 인권 침해라는 비판이 대단히 높다.

이에 따라서 보험회사나 고용주가 유전자검사를 요구하거나 혹은 개인의 동의 없이 유전정보를 확보하려는 시도는 당연히 금지되어야 할 것이다.

미국의 42개 주와 21개 주는 각각 보험과 고용에서 유전자차별을 금지하는 법을 시행하고 있다.

▼국가에 의한 인권침해 ▼

한편 범죄수사용으로 국가에 의해서 개인의 유전정보를 수집하려는 시도 역시도 인권침해의 소지가 대단히 높다.

각 개인들이 자신의 질병 등의 진단을 위해서 스스로의 동의하에 유전정보를 분석하여 알게 되는 것은 개인의 자유문제라고 할지라도, 국가에 의해서 범죄수사 목적으로 개인의 유전정보를 강제적으로 분석·보관·이용하는 것은 헌법에 보장된 사생활 보호의 권리를 침해하는 일이다.

유전자정보은행의 대상이 비록 범죄자로 국한된다고 하더라도 해당 범죄의 재범율과 유전적 연관성 등에 대한 과학적 근거가 제시되지 않는다면 수사의 편의를 위한 국가의 인권침해라는 비난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나무를 보다가 숲을 보지 못한다는 금언이 있다.

유전정보의 이용의 가능성과 그 위험성을 둘러싼 논쟁에 몰두하다 보면, 많은 사람들이 자신도 모르게 '유전자 이데올로기'에 휩쓸려가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하지만 유전자의 낯설음을 거두어 내면, 그 자리에는 언제나 마주치는 인간과 자연을 쥐어짜는 현대문명의 비정함을 보게 되고 사회경제적 불평등과 억압과 마주하게 된다.

그곳에 언제나처럼 시민들의 투쟁이 있다.

한재각/참여연대 시민과학센터 간사 hanclk@pspd.org

(이 글은 '함께사는길'5월호에서 발췌했습니다. http://www.kfem.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