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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릭! 현장21]서태지 귀국현장 스케치

입력 | 2000-09-06 10:47:00


“6시쯤 서태지가 온다니 거기 한 번 가봐라.”

공항이란 말만 듣고 무작정 취재에 나섰다. 지하철에 오르자 처음 그의 컴백을 접했던 순간이 떠올랐다.

점심을 먹으러 밖으로 나오는 길이었다. 신문 가판대 옆을 지나던 회사동기가 대뜸 외쳤다.

“서태지가 컴백한대!”

스포츠신문 1면을 장식한 그의 사진 옆에는 ‘컴백’ 두글자가 대문짝만하게 쓰여있었다.

그냥 소문이겠지…하는 기우는 채 며칠을 가지 못했다. 온갖 신문과 방송에서는 그의 새앨범의 음악적 성향과 9월에 컴백하는 서태지, 조성모, HOT에 대한 3파전의 우세를 점치는 보도가 앞다투어 보도되기 시작했다.

서태지가 이번에는 힘들거라는 둥 서태지는 어차피 1위일테니 조성모랑 HOT가 벌이는 2위다툼이 더 재밌을 거라는 둥 갖가지 예상이 봇물처럼 터져나왔다.

그리고 약속했던 2000년 8월 29일. 그는 거짓말처럼 우리곁으로 다시 돌아왔다.

떠남과 돌아옴이 있는 곳, 공항. 누구든 돌아온다는 것은 가슴 설레게 반가운 일이다. 4년 7개월만이었다.

지하철 공항역의 문이 열리자 익숙한 외마디 계시가 들려왔다. “야, 뛰어!”

두 여학생을 따라 허겁지겁 뛰다보니 어느덧 국제선 제1청사. 그때가 5시 50분이었다.

공항 안은 그야말로 전형적인 스트레이트 기사의 리드였다. “…이날 공항은 서태지의 팬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그가 좋아하는 노란색에 그의 영문이름 ‘TAIJI’가 새겨진 손수건으로 완전무장한 소년소녀들이 입국장 1·2번 출구 정면에 참새떼처럼 모여앉아 있었다.

이들은 앞에 서있는 경찰들을 향해 “앉아주세요” “비켜주세요” 를, 주변에 서있는 팬들을 향해 “우리는 태지팬, 다같이 앉자”는 구호를 외치고 있었다.

뒷편 팬들 사이에 자리를 잡고 앉자 옆에 있는 두 아가씨의 대화가 들린다.

“나 떨려죽겠어. 아깐 실감 안났었는데 여기 오니까 너무 떨려. 어떡해…”“난 태지가 뭐라고 말하면 기절할 지도 몰라. 20분에 도착한다는데 그럼 지금 한국땅에 있는 거 아냐. 김포에…”

반대편의 소년들도 이야기를 나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일찍 도망나와서 앞에 앉았을텐데… 앞에 앉은 애들은 얼마나 행복할까.”“난 겨우 5분 기다렸는데 1시간은 지난 것 같아.”

6시 20분이 되자 분위기는 점점 고조되어 팬들은 “민중의 지팡이 민중말을 들어라”는 구호를 외치며 앞쪽에 겹겹이 늘어선 경찰들을 강하게 비난하기 시작했다. 이와 함께 반대편 출구를 막은 기자들을 향해 구호를 외치기 시작했다.

“앉아라!” “비켜라!”

구호는 어느덧 반말로 변해있었다.

6시 23분, 경찰들이 드디어 자리에 앉자 모두는 환호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고맙습니다”를 연발하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태지의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내 모든 걸 당신께 말해주고 싶어/작은 마음 드리리라/나는 항상 그대의 마음곁에 있어/소중한 건 너이기에…’

노래가 끝나자 이들은 함께 함성을 지르며 분위기를 가다듬기 위해 “질서정연! 질서정연!”을 외쳤다.

빽빽이 붙어앉은 팬들은 더운 날씨에 이미 땀범벅이 되고 있었다. 뒷사람이 “서태지!”를 연호할 때마다 목덜미에 더운 입김이 훅훅 끼치고, 옆사람의 팔은 쩍쩍 들러붙다 못해 땀으로 미끄러질 지경이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 부채질을 해주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일어선 남학생은 가지고 있는 클리어 화일로 앉아있는 사람들의 머리위를 휘휘 부쳐주었고, 아가씨는 손에 든 광고전단으로 주변 사람들을 끊임없이 부채질해주었다. 휴지를 빌려주며 땀을 닦거나 서로가 가진 서태지의 사진과 신문기사를 바꿔가며 구경하기도 했다.

나는 그 순간 생뚱맞게도 대학 때 참가했던 집회 생각이 났다. 여름엔 땀에 절은 몸으로 물 한모금을 나눠마시고, 겨울엔 열없이 붙어앉아 추위를 견디던 순간들. 뒤에서 쫓아오는 전경들을 피해 뛰면서도 대오가 흐트러지지 않기 위해 “질서!” “질서!”를 외치기는 너무도 무섭고 두려웠었다.

지금 이들이 외치는 “질서정연!”에 그 구호가 공명되는 것은 왜일까. 질서를 잃지 않기 위해 스스로 정리구호를 외치고, 서로 부채질을 해주며 앉아있는 이들 또한 나름의 방식대로 자신들의 요구를 표현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러던 찰나, 드디어 서태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팬들은 미친듯이 함성을 질렀고, 나도 모르게 서태지를 연호했다. 그 순간만큼은 모두 하나가 되었다.

그는 눈을 뜰 수 없이 번쩍거리는 플래쉬 사이로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과 수많은 기자들에 둘러싸여 있었다. 문틈에 끼이다시피 출구 밖으로 아주 잠깐 튕겨져나온 그는 그러나 군중속에 섞여 다시 입국장 안으로 들어갔다.

공항은 서태지를 못봤다고 울먹이는 소녀들과 봤다며 흥분하는 소년들, 군중에 치여 다칠까봐 걱정하는 팬들로 일순간에 술렁거렸다. 기자들에 가려 서태지를 보지 못한 소녀들은 “우리 태지 내놔”를 외치며 기자들을 향해 야유를 퍼붓기도 했다.

7시10분, 극도로 동요하던 팬들은 애국가를 부르며 분위기를 정돈하기 시작했다.

긴머리는 땀에 젖어 목덜미에 감겨붙고 얼굴에 줄줄 흐르는 땀을 노란 손수건으로 연신 닦으면서도 팬들은 결코 “서태지!”를 연호하는 것을 그치지 않았다.

한 소년의 말처럼 '10분이 1시간처럼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그러던 7시 45분. 장내에 방송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알려드립니다. 아시아나 201편으로 로스앤젤레스에서 귀국한 가수 서태지는 이미 공항을 떠났습니다. 다시 한 번 알려드립니다…”

하나같이 허탈한 표정이었다. 믿을 수 없다며 분노하는 소녀도 있었고, 말없이 자리를 이동하는 소년도 있었다. 뒷문으로 나갔다는 소문만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 팬들은 풀린 신발끈을 다시고쳐 묶고, 흙범벅이 된 무릎을 툭툭 털고 일어나 땀에 절은 머리칼을 매만졌다.

이 때 한 소녀가 인터넷에서 출력한 서태지의 사진을 보여주자 수많은 팬들이 일시에 사진을 향해 전력질주하는 소동이 있기도 했다. 이들은 A4용지에 인쇄된 서태지의 모습을 부여잡고 때로는 울고 때로는 소리를 질렀다.

한 아저씨가 “우연히 서태지를 봤다”고 하자 “무슨 옷을 입었어요?” “무슨 안경 썼어요?”하며 만나지 못한 아쉬움을 달래기도 했다.

몇몇은 9시 뉴스에 나오는 서태지를 보겠다며 공항 대기실 TV앞에 앉아 기다리기도 했다. 누군가가 “앞에 좀 앉으세요” 하자 어떤 학생이 “맨날 앉으래!”하며 퉁명스러워 했다. 팬들도 지쳤던걸까.

지하철 역으로 향하자 문득 사람들이 들고있는 물건에 눈이 간다. 만나면 건네주려 했던 듯 노란 봉투 꾸러미와 노란 쿠션을 들고 가는 여학생에, 노란 바지를 입고 노란 꽃다발을 들고 머리엔 노란 손수건을 묶은 열성팬까지…

남학생 하나가 공항엔 생전 처음인지 “영등포 가려면 여기서 타는 거 맞나요” 묻는다. 생전 처음보는 얼굴들이지만, 모두 아주 친해진 느낌이다.

큰 혼잡 없이 삼삼오오 짝을 지어 조용히 제 갈 곳으로 향하는 이들을 보니 ‘우리나라 팬클럽 문화의 효시’라는 칭송에 절로 수긍이 간다.

서태지는 9일 단독콘서트를 갖고 가수활동을 재개한다고 한다. 그의 컴백은 현 한국 가요계에 또 한번의 혁명을 가져올 것인가. 그리고 나 또한 그때처럼 다시 한 번 열광할 수 있을 것인가.

앞으로의 그의 활동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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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세린/동아닷컴기자 ohs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