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트렌드 생활정보 International edition 매체

[씨네존/동감 특집]'동감'에 뒤늦게 '동감'한다

입력 | 2000-06-14 10:59:00


'화이트 리 엔터테인먼트'의 이동권 사장이 영화사 '한맥'의 김형준 대표를 찾은 것은 올해 초. 그의 손에는 이 사람 저 사람 손을 거쳐 겉장이 너덜너덜해진 시나리오 책이 한 권 들려 있었다. 제목은 .

두 남녀 대학생이 아마추어 무선통신을 통해 30년간의 시간(당초에는 30년 차이였지만 수정작업을 거쳐 77학번 여대생과 99학번 남학생이라는, 20년 간극으로 좁혀졌다)을 뛰어 넘어 교감과 사랑을 나눈다는 얘기다. 20여년전에 제작된 비슷한 분위기의 미국영화 의 내용에 매료돼 결국 영화판권까지 사들인 김형준씨는 무릎을 쳤다.

우리얘기로도 충분히 영화가 될 것 같았다. 둘은 그때부터 제작비 마련을 위해 뛰어 다녔다. KTB(한국종합금융)같은 곳에도 시나리오를 넣었다. 그러나 결과는, 모두 다 '거절'이었다. 지나치게 소품이다, 저예산 작품은 남는 게 없다, 내용이 너무 밋밋하다 등등 거절의 이유는 각양각색이었다.

결국 둘이서 돈을 모아서 영화를 만들기로 했다. 모자란 돈은 같은 괜찮은 영화들을 들여 오긴 했지만 그다지 재미를 보지 못하고 있던 '올리브 커뮤니케이션'의 김순년 사장을 끌어 들여 마련했다. 욕심부리지 말고 '담백하게' 만들면 손해는 보지 않을 것이라고들 생각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같은 예상은 빗나갔다. 오히려 흥행에서 크게 성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은 개봉 2주만에 서울 15만, 전국은 그 세배 수준인 50만명 가량의 관객을 동원했다(제작사 '한맥'의 자체 집계). 휴일이었던 지난 6일 현충일때는 전국에서 8만5천명의 관객을 동원하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흥행은 서울보다 지방에서 바람몰이가 더 거센 것만큼은 분명한 것 같다. 이는 그만큼 서울 배급 싸움에서의 열세를 지방에서 회복시키고 있다는 얘기다.

실제로 은 비교적 관객이 잘 든다는 서울의 '허리우드'나 '명보' '시네플러스' 등에 들어가지 못했다. UIP의 를 의식한 이들 극장주들이 같은 배급사 작품인 을 내리지 않고 그대로 가져갔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은 직배사의 배급 '횡포'에도 불구하고 싸움이 어렵다는 '여름전쟁'에서 살아남은 셈이 된다.

의 이같은 성공적인 흥행은 최근 국내 영화계 사정에 비추어 볼 때도 각별한 의미를 갖는다. 국내 영화계는 올들어 1월부터 6월까지 을 제외하고는 거의 전작품이 전멸 위기를 겪었기 때문이다(Film2.0 기사 "한국영화, 이보다 더 나쁠 수는 없다" 참조).

국내 영화계가 빈사상태를 헤매고 있는 가운데 모두들 어떤 작품인가가 경기를 반등시켜 주기만을 고대하고 있는 실정이었고 일부 영화 관계자들은 나 같은 비교적 큰 규모의 영화가 그 역할을 할 것으로 내심 기대해 왔다. 제작비 10여억에 불과한 이 그 일을 해내리라고 예상했던 사람은 거의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마디로 작지만 '똘똘한' 영화 한편이 올 한해의 국내 영화계를 구원하는 신호탄을 쏘아 올린 셈이 됐다.

평단의 반응도 예상대로 뜨거운 편이 아니었다. 그저 평범한 작품이라는 정도. 분위기는 깔끔하지만 연출이 다소 아쉽다 등등이었다. 청춘스타를 내세운 트렌디 드라마 정도에 불과한 작품일 뿐 심각하게 받아들일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바로 그 점이야말로 이 영화가 2000년 한국영화사에 의미있는 방점을 찍는 것이기도 하다. 10대 취향의 트렌디 드라마까지 확실하게 흥행대열에 오르게 함으로써 국내 영화의 외연을 그만큼 확장시킨 결과를 가져오게 됐기 때문이다. 다양한 장르영화가 성공하면 할 수록 작가주의 영화나 실험적인 작품들이 숨쉴 공간이 그만큼 넓어진다.

다소 빈약한 측면이 있긴 하지만 70년대적 정서를 90년대 N세대로 융합시켰다는 점에서 이 영화에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들도 있다. 영화에 있어 7,80년대란 이제 '한물 간' 소재다. 처럼 머리띠를 매고 치열한 싸움을 준비하는 영화가 아닌 한 당시를 소재로 영화를 만든다는 건 무모한 짓에 속한다.

우리 영화들이 그 흔한 시대물 하나 제대로 성공시키지 못하는 것은 그만큼 지금의 영화세대들이 빠르고 답이 간단한 할리우드 영화에 더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고 당연히 제작자로서는 70년대 이야기에 관심이 없다. 은 간편한 정서를 추구하는 젊은 세대들을 향해 우리 현대사의 가장 힘겨웠던 얘기를 작게나마 전해주려는 노력을 엿보였다는 평가를 받을 만하다.

제작사측에서는 이 영화의 흥행을 전국 80만 정도로 바라보고 있다. 작년의 이나 수준 정도다. 두 작품 모두 마케팅에 열을 올렸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의 승리는 조용하다. 일단 전국 50만 관객을 넘기 위해서는 극장 수요의 주요 타겟층인 10대와 20대 초반 젊은이들만으로는 불가능한 얘기다. 30대 이상 장년층의 접근이 필요하다.

공동제작자인 이동권씨는 "이른바 아줌마 부대 관객이 영화를 찾고 있다"며 "아마도 70년대 상황을 엮은 감독의 시대적 설정이 어느 정도 먹혀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또 다른 풀이도 가능하다. 은 70년대 후반과 80년 후반 학번의 제작자와 감독이 만나 함께 만든 작품이다. 영화의 남녀 주인공에 대한 설정과 흡사한 분위기다.

7,80년대란 우리에게 있어 가장 세대차가 극심한 시대지만 제작자와 감독의 정서가 충돌하지 않고 조화를 이뤄 얘기를 만든다면 얼마든지 다양한 연령층의 관객을 포획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것이 비록 판타지 멜로물인 경우라도 말이다.

[오동진(ohdjin@film2.co.kr) 기자]

기사 제공: FILM2.0 www.film2.co.kr
Copyright: Media2.0 Inc.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