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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학준씨 현지 분석]옐친탄핵안 부결이후…

입력 | 1999-05-17 20:12:00


국제적 관심을 모았던 러시아 정계에서의 한판의 진검 승부가 끝났다. 연방 하원인 국가 두마는 15일 보리스 옐친 대통령에 대한 탄핵안을 다섯 조항 모두 부결시켜 옐친을 일단 위기에서 구해준 대신에 ‘러시아연방 공산당’이 중심이 된 반대세력에 패배를 안겨주었다.

옐친 대통령이 국내외에서 그런대로 신망을 받는 예브게니 프리마코프 총리를 12일 해임한 데 격앙돼 반(反)옐친 세력이 탄핵절차를 밟기 시작한 13일만 해도 분위기는 탄핵안 통과쪽으로 기울었다. 여론조사 결과 옐친에 대한 국민지지가 2%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 주요 언론들이 옐친 비판의 수위를 높였다는 사실, 그리고 내각에도 옐친의 프리마코프 해임에 항의하는 각료들이 나왔다는 사실 등이 그런 분위기를 부채질했다.

그러나 옐친 세력은 현직자의 프리미엄을 충분히 활용했다. “설령 연방 하원이 탄핵안을 통과시킨다고 해도 연방 최고법원과 헌법재판소의 승인 절차를 밟은 뒤 연방 상원의 최종 표결까지 가려면 앞으로 넉달 정도는 더 걸려야 하는데, 그동안 국정은 완전히 마비되고 만다. 게다가 그 시점부터 따져 옐친의 임기는 8개월밖에 남지 않는데, 굳이 탄핵한다고 해서 무슨 이득이 있겠느냐”는 호소, “최악의 경우에는 의회를 해산하거나 물리력을 동원할 수 있다”는 협박, 주로 국영기업체들의 이권을 둘러싼 막후거래 등 여러가지 수단이 동원된 것이다.

가장 큰 효과를 본 것은 이권흥정인 것으로 알려졌다. 모스크바 뉴스에 따르면 어떤 의원들은 대통령궁을 상대로 “탄핵안 표결에 반대하거나 불참할 테니 얼마를 주겠느냐”고 흥정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가장 크게 챙긴 쪽은 ‘러시아의 히틀러’로 불리는 극우민족주의자 블라디미르 지리노프스키 자유민주당 당수와 그의 지지자들이었다고 보도됐다.

이런 정치현실에 대다수 국민은 더욱 냉소적이 됐다. 그 점은 “정치 게임이 너무 더러워지고 뻔해서 이제는 구경꾼이 한 사람도 없다”는 정치평론가들의 빈정거림에 잘 나타나 있다. 실제로 모스크바의 거리는 탄핵파동에 무관심했다. 두마 의사당 앞거리에서 공산당이 동원한 것으로 짐작되는 많지 않은 시민들이 “옐친을 탄핵하라”는 구호를 외친 것이 고작이었다.

확실히 옐친대통령은 한숨 돌리게 됐다. 그러나 다급한 발등의 불을 껐을 뿐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내년 6월에 두번째 임기를 끝낸 이후의 안전 문제는 여전히 풀리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가 ‘초헌법적 조처’를 통해 임기를 연장하거나 현재는 금지된 3선을 추구하지 않겠느냐는 비상식적인 추측이 나돌기조차 한다.

이와 관련해 일부 언론매체들이 일종의 ‘현실적 타협안’을 제시하는 것이 관심을 끈다. 예컨대 모스크바 타임스가 사설을 통해 “옐친은 내년 6월에 임기가 끝나는 대로 퇴임하겠다는 공약을 지금부터 매일같이 반복하고 의회는 그의 퇴임 이후의 안전보장을 약속하는 쪽으로 입법화하자”고 제의한 것이다.

그러나 상황은 결코 간단하지 않다. 옐친대통령이 서방언론의 표현으로 ‘살아 남았다’고 해도 이미 약화된 그의 권위는 더욱 줄어들게 됐다. 뿐만 아니라 연방정부의 권위가 더욱 줄어들고 그 틈새를 이용해 지방정부들은 영향력을 더욱 넓힐 수 있게 됐다. 그래서 종국적으로는 연방정부와 지방정부들을 연결하는 끈이 훨씬 느슨해질 것이며 몇해가 지나면 어떤 지방정부들은 연방으로부터 탈퇴하는 일까지 벌어질 것이라는 예견마저 나오고 있다.

러시아의 국내사정은 그렇다고 해도, 옐친의 ‘생존’으로 가장 크게 마음을 놓게 된 외국의 정치지도자는 미국의 빌 클린턴 대통령이다. 그는 미국 외교의 당면 현안인 유고슬라비아에 대한 전쟁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기 위해선 옐친의 도움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신 앞에 넘어야 할 산과 건너야 할 강이 수없이 놓여있는 옐친이 과연 얼마나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인지 많은 관측자들은 걱정한다. 그만큼 러시아의 정정은 내일을 예측하기 어려울 정도로 불안하기만 하다.

〈모스크바〓김학준 논설고문·인천대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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