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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오래된 정원(84)

입력 | 1999-04-07 20:43:00


이틀을 쇠고 올라오는데 마침 전평의 파업 뒤끝이라 밀린 승객들이 어찌나 많았는지 서로 타고 내리느라고 객차의 유리창은 다 깨어지고 객차 안의 짐 싣는 선반 위에까지 사람이 가득 올라가 앉았더라구 해요. 승강구에 가까스로 매달려 가다가 차츰 안으로 밀려서 화장실 앞 통로에 주저앉아 가게 되었대요. 그런데 바로 옆 자리에 단발머리의 아가씨가 가방을 놓고 쪼그려 앉아 있더라지요. 아가씨는 학생이었고 아버지처럼 고향에 내려가서 양식을 구해 올라오는 중이었어요. 두 사람은 이야기는 별로 나누지 않았어도 지식인들은 느낌으로 알지요. 여학생은 이와나미 문고를 보고 앉아 있었지요.

열차가 개통된지 이제 겨우 이틀이라 혼잡한 모양이오.

아버지는 륙색을 내려놓고 여학생에게 깔고 앉도록 해주었대요.

파업한 철도원들이 수천명 잡혀 갔답니다.

아버지는 여학생이 들고있는 문고판을 넘겨다보며 말을 걸었지요.

그런데 뭘 읽고 있소?

여학생이 부끄러운 듯이 책을 뒤집어 표지를 보여 주었대요. 엥겔스의 ‘가족·사유재산과 국가의 기원’ 이라는 책이었죠. 아버지는 금방 그네를 알아 볼 수가 있었죠.

학생은…어디 소속이오?

민청입니다.

아 그래요? 반갑소. 지금 대구 영남지방에서는 인민항쟁이 시작되구 있어요. 아마 전국으로 번져 나갈 거요.

저희두 국대안 반대 투쟁 중입니다.

서울대에서 시작되어 전국으로 퍼져 나가구 있죠.

해방은 아직두 멀었소. 처음부터 다시 시작이오.

선생님은…학교에 계신가요?

아뇨, 학교는 일본서 진작 때려치웠고, 지금은 지방에서 일하구 있어요.

그들은 별로 많은 말을 나누지 않았어도 서로가 알았어요. 그들은 날이 새려면 아직도 한참이나 남은 새벽 세 시에 서울역에 내렸어요. 전차가 유일한 교통수단이었는데 모두 끊긴 시간이었고 당시의 시국은 서울과 전국이 비상경계 상태여서 날이 밝아지기 전까지는 귀가할 수가 없었대요. 서울역 대합실에는 신문지를 깔고 새벽잠을 자는 사람들로 발 디딜 틈도 없었다지요. 두 사람은 대합실 출입구에 기대서서 날이 새기를 기다리고 섰는데 아주머니가 다가와서 물었죠.

하숙 가세요. 값도 눅고 여기서 가깝답니다.

학생, 어디 가서 쉬었다 가는 게 낫겠는데.

하면서 아버지가 여학생의 가방을 들고 일어서자 그네는 말없이 따라 나섰대요. 서울역 근처의 골목들을 요리조리 빠져나가 일본식 여인숙에 당도했는데 아주머니는 그들을 보통 사이로 보지 않았는지 물어볼 것도 없이 방에 안내를 해주더래요. 삼조 다다미 방이었는데 웃목에 이불이 개켜져 있었고 숯불 고다쓰도 들여 주더랍니다. 둘은 그냥 불을 끼고 마주 앉아서 날 새기를 기다렸대요. 기다리는 시간이 지루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배가 고파서 못견디겠더래요. 한창 시절에 저녁 먹고 나서 간식도 없이 날밤을 새우고 기차를 탔으니 더욱 시장했겠지요. 아버지는 륙색에 손을 넣어 더듬거려서 고향에서 할머니가 싸준 떡을 내어 그네에게 내밀었어요.

이거 드시오. 배고플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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