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를 땅에 대고 낮은 곳으로 포복하는 물은 눈이 없다… 눈이 없는 물의 머리는 온통 투명한 눈이다.’(박목월 ‘비유의 눈’중)
시인이자 대학에서 문학을 가르치는 작가 한광구(55·추계예대 교수)에게 이 시구는 오랜 화두(話頭)였다. 가난과 독재의 폭력성과 민주화의 열망을 시대순으로 치러내며 어느덧 ‘기성세대’가 되어버린 자신. 온몸으로 살았으나 지천명을 넘기고도 ‘나는 누구인가’라는 해답에 여전히 주춤거리는 스스로를 해명하기 위해 그는 시 아닌 소설을 썼다. ‘물의 눈’(모아드림).
광고회사 사장 자리를 아내에게 넘기고 훌쩍 일상을 떠나는 성공한 중년남자 서현섭. 그 방랑과정에서 현섭은 자신처럼 ‘열심히 살았으되 허탈한’ 남녀들을 길동무로 만나 끝없이 질문을 던진다. 아내 아닌 여자들의 몸을 통해 육체적 쾌락이 자유에 이르는 한 길이 될 수도 있음을 체험한다. 그러나 궁극에 그가 얻는 깨달음과 자유는 금지된 사랑을 나누었던 30대 여인 혜미의 이별 편지에 집약된다.
‘…따지고 보면 내가 꿈꿨던 사랑은 꿈꾸는 욕망이었지요. 내가 사랑했던 사람들은 이 욕망으로 빚은 하나의 기호에 불과했습니다. 이제 그 기호들을 자유롭게 풀어줌으로써 나 스스로 자유롭기로 했습니다.’
진정한 생명력으로 충만해 떠났던 자리로 돌아오는 서현섭. ‘세상을 명징(明澄)하게 보는 눈이 있다’고 말하지 않되 온몸이 곧 맑은 눈이 되어 삼라만상에 스미는 물처럼 넉넉하고 자유로운 모습이다.
〈정은령기자〉ryu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