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트렌드 생활정보 International edition 매체

[주니어]「제2의 이창호」꿈꾸는 바둑 사관생도들

입력 | 1997-08-12 08:16:00


서울 홍익동 한국기원에는 주말만 되면 신세대 고수들이 우르르 몰려든다. 대부분 까까머리의 앳된 중학생. 간혹 여학생도 눈에 띈다. 이들에겐 한국기원 연구생이라는 「거창한」 타이틀이 붙어있다. 준프로급의 기력을 갖춘 바둑사관생도. 저마다 제2의 이창호를 꿈꾸는 아마추어 바둑 최고수들이다. 정기 평가전을 벌이기 위해 주말이면 한국기원을 찾는 것. 현재 한국기원에 소속된 연구생은 1백여명. 연구생이라고는 하지만 기원에서 따로 배우는 것은 없다. 단지 주말마다 서로 기력(기력)을 겨뤄 순위를 매기며 스스로 기력을 향상시키는 게 전부다. 1백명 가운데 상위 클래스 10명에게만 1년에 한 번 있는 연구생 프로입단대회에 출전할 자격이 주어진다. 그래서 매주 열리는 평가전은 늘 팽팽한 긴장감이 감돈다. 한국기원에서 뽑는 프로기사는 한해 고작 6명. 그나마 2명은 여류(女流)입단대회에서 배출되어 남성 문호는 4명이 전부인 셈. 프로로 가는 길이 「바늘구멍보다 더 작은 구멍」이라는 소리가 나올 법도 하다. 기껏해야 한해에 두세명의 연구생이 프로행 티켓을 손에 쥔다. 아무리 「짱짱한」 실력을 갖고 있어도 워낙 경쟁이 치열해 꼭 프로가 된다는 보장은 없다. 나이는 어리지만 이들의 실력은 이미 아마추어의 경지를 훌쩍 넘어있다. 머리가 희끗희끗한 강호의 초고수들도 이들과 일전을 벌이면 펑펑 나가 떨어진다. 연구생이 아닌 일반인이 프로에 입단하는 경우가 거의 없는 것을 생각해보면 실력차를 짐작할 수 있다. 4,5년씩 주말마다 서로 만나다 보니 때로는 친구보다, 형제보다 더 마음이 통할 때가 있다. 하지만 동료 친구이기에 앞서 경쟁상대. 바둑판을 앞에 두면 연민에 빠져 있을 겨를이 없다. 인정사정 없다는 소리를 들어도 할 수 없다. 바둑은 인생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바둑을 둔다고 「애어른」 같으려니 하고 생각하면 착각. 바둑판을 치우면 이들도 역시 요즘 10대들이다. 최신곡들을 줄줄이 꿰고 있다. 전자오락 PC통신도 한다. 하지만 역시 취향은 보통 애들과는 좀 다르다. HOT보다는 김종서를 좋아한다. 잘 나가는 댄스곡들은 정신이 없다. 가끔 열리는 장기자랑은 부드럽고 느린 발라드곡들로 채워지게 마련이다. 또래들이 대입을 목표로 입시에 매달려 지낼 때 이들은 바둑판과 씨름한다. 학교 공부는 늘 뒷전이다. 대학도 별로 관심없다. 오히려 학교는 걸림돌일 때가 많다. 부산에서 올라온 하성봉군(16)은 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학교를 그만뒀다. 이정희양(과천외고1)은 바둑 때문에 1년을 쉬었다. 이들처럼 학교를 쉬거나 아예 그만두는 경우가 상당수 있다. 연구생 지도사범을 맡고 있는 강훈9단은 『학교를 그만 두고 오직 바둑만 두게 하는 게 어떠냐며 상담을 요청하는 부모들이 꽤 있다』고 말했다. 물론 반대로 평범한 길을 가줄 것을 바라는 부모도 있다. 학교 공부도 꽤 잘하는 편인 한해원양(수원 동우여고1)은 『보통 친구들처럼 공부를 해서 대학에 가기를 바라는 부모님과 의견 충돌을 일으키는 경우도 있다』고 털어 놓는다. 하지만 바둑을 선택한 것에 대해 후회는 없다. 오직 프로가 되는 그 길을 향해 시간만 나면 바둑판을 꺼낸다. ▼ 한국기원 「바둑 연구과정」 ▼ 프로가 되는 길에 편법이나 왕도는 없다. 오로지 혹독한 자기 정진과 철저한 경쟁이 있을 뿐이다.1백명의 연구생들은 기력에 따라 10명씩 10개조로 편성돼 있다. 1조에서 6조까지가 1군, 나머지는 2군이다. 조마다 매달 리그 형식으로 평가전을 벌여 순위를 조정한다. 1등에서 4등까지는 상위조에서 성적이 나쁜 4명과 자리바꿈을 한다. 10조에서 시작해 1조까지 올라가려면 아무리 빨라도 9개월이 걸린다. 워낙 실력이 서로 엇비슷하다보니 올라가는 게 결코 쉽지 않다. 오히려 방심하다가는 끝없이 밑으로 추락하기 일쑤다. 경쟁에서 이겨 1,2조에 남아있는 연구생들은 거의 프로와 맞먹는 고수이다. 바둑이라는 게임이 그렇듯 룰은 매사에 엄격하게 적용된다. 사관생도라는 별명이 붙는 것도 이때문이다. 수업이 없는 주말에 열리는 평가전에 30분만 늦어도 기권으로 간주한다. 대국의 제한 시간은 각자 1시간반. 10분을 지각하면 그 두 배인 20분을 제한시간에서 뺀다. 엄청난 불이익이다. 때문에 누구도 늦는 법이 없다. 나이 제한도 경쟁의 한 요인이 된다. 연구생으로 남을 수 있는 마지노선은 만 18세. 이때까지 프로에 입단하지 못하면 눈물을 머금고 하산해야 한다. 기재(棋才)가 모자라 프로가 되어도 대성하기 힘드니 다른 길을 찾아보라는 뜻이다. 경쟁속에서 갈고 닦은 실력이라 일단 입단하면 프로무대에서도 이들의 활약은 대단하다. 최연소 국제대회 본선진출의 기록을 세운 이세돌초단(14)을 비롯, 요즘 뜨는 저단진은 거의가 연구생 출신이다. 〈홍석민기자〉

트랜드뉴스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