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에게는 누구나 평생 잊지 못할 기억이 있다. 신한국당 李會昌(이회창)대표에게 그런 기억을 하나만 말해 보라면 그는 한국동란이 터지기 3개월전인 50년 3월말을 떠올릴 것이다. 『경기중학교 4학년에 재학중이던 나는 중간시험 공부에 한창이었다. 거칠게 대문을 여는 소리와 함께 대여섯명의 젊은 남자들이 명륜동 집으로 들이닥쳤다. 깜짝 놀란 식구들의 외침을 뒤로 하고 아버지는 그렇게 끌려갔다』 이대표는 자신의 책 「아름다운 원칙」에서 부친 李弘圭(이홍규·93)옹이 서울지검 검사로 일하던 중 구속됐던 일을 이렇게 회상한다. 이옹은 청주지검에 근무했을 때 李承晩(이승만)대통령과 가까운 충북도지사를 구호물자 횡령혐의로 구속하면서 미움을 샀고 서울지검으로 온 뒤 남로당원 누명을 쓴 사람들을 풀어줬다가 반공법 위반 혐의로 구속됐다. 「해방후 현직검사 구속 1호」를 기록한 이홍규검사 구속사건은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사춘기를 맞고 있던 15세의 소년에게 얼마나 큰 충격을 주었는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이대표는 그때의 충격을 『아버지보다 크고 강하고 사악한 존재가 바깥세상에 존재한다는 사실에 나는 경악했다』(아름다운 원칙)고 적고 있다. 평생동안을 그를 「지배」해온 법과 질서, 불의에 대한 관념같은 것들이 소년 이회창의 가슴에 자리잡는 순간이 아니었던가 싶다. 사실 그의 인생에 가장 긴 그림자를 드리운 사람이 아버지라는 사실은 이대표 자신도 동의한다. 「대쪽 판사」 전에 「대쪽 검사」가 있었던 것이다. 그의 부친 이옹은 29년 서울대법대의 전신인 경성법전을 졸업하고 검찰청 사무원으로 일하다 해방직후 광주지검 검사로 특임됐다. 그러나 검사가 된 뒤에도 어린 이회창이 친지들에게 쌀을 꾸러 다닐 정도로 강직했다. 이대표가 판사시절 관행적으로 통용되던 변호사의 돈봉투, 속칭「실비(實費)」를 받지 않은 것도 청렴했던 아버지의 영향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이옹은 이대표에게 무언의 교육을 했을 뿐 아니라 이대표의 인생 고빗길마다 중요한 역할을 했다. 朴禹東(박우동)전대법관은 『서울지법 부장판사 시절 이회창과 나, 吳成煥(오성환·전대법관) 셋이서 합동으로 변호사를 해보기로 합의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회창의 부친이 대로하는 바람에 수포로 돌아갔다』고 기억한다. 그때 이옹이 말리지만 않았더라면 오늘의 이대표는 없었을는지도 모른다. 부친의 수범(垂範)때문이었던지 법조시절의 이후보는 말 그대로 「대쪽」이었다. 81년 마흔 여섯의 나이로 최연소 대법원 판사에 임명된 뒤 재임 5년동안 대법원 전원합의체에 넘겨진 46건 가운데 무려 13건의 재판에서 소수의견을 냈다. 朴世徑(박세경)변호사의 계엄포고령 위반 사건과 한국기독교청년협의회 김기철총무의 국가모독죄 재판에서의 소수의견 등 그의 소신 판결은 여론의 관심을 불러모았다. 이대표의 삶이 결정적인 전기(轉機)를 맞게 된 것은 金泳三(김영삼)대통령과의 「운명적인」 조우(遭遇)를 하면서부터다. 김대통령만 아니었다면 그의 인생은 법조에서 끝났을지 모른다. 이대표와 김대통령이 첫 관계를 맺게 된 것은 89년4월 동해시 보궐선거. 88년7월 대법관 겸 중앙선거관리위원장으로 임명된 이대표는 4당후보와 선거사무장을 무더기로 고발했다. 이에 민주당이 선관위를 비난하자 이회창선관위원장은 즉각 김영삼민주당총재에게 경고서한을 보냈다. 이대표와 김대통령의 관계는 이처럼 첫 단추부터 팽팽한 긴장으로 시작됐다. 집권에 성공한 김대통령은 93년2월 이대표를 감사원장에 임명했다. 하지만 여기서도 율곡비리와 관련해 전직대통령에 대한 조사를 강행하려다 청와대와 마찰음을 냈다. 그럼에도 김대통령은 93년12월 이대표를 국무총리로 중용했다. 그러나 이대표는 「얼굴마담 총리」를 참지 못하고 재임 4개월7일만에 미련없이 사표를 던졌다. 개혁의 상징과 같던 이총리의 사표는 김영삼정부 개혁에 깊은 상처를 입혔다. 반대로 이대표는 일약 국민적인 인물로 부상했다. YS와 이대표의 질긴 연(緣)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95년 지방선거에서 대패한 김대통령은 96년 총선을 앞두고 다시 이대표에게 「구원 등판」을 요청했다. 한보사태와 金賢哲(김현철)씨 문제로 곤경에 몰리던 지난 3월 그를 「정면돌파용」 당 대표에 지명했다. 결국 김대통령은 정치인 이회창에게 대표직이라는 날개를 달아줌으로써 이대표가 비상(飛翔)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 주었다. 이대표의 한 핵심측근은 『아이로니컬하게도 이회창의 오늘은 YS 덕분이다』고 말했다. 이대표는 김대통령과 팽팽한 긴장관계를 유지하면서 정치적으로 성장했다. 반대로 말하면 김대통령은 이대표에게 치받치면서도 끊임없이 이대표를 필요로 했다는 얘기도 된다. 그러나 집권당대표가 되면서, 보다 엄밀히 말하면 「대망(大望)」이 눈앞에 보이면서 「대쪽」은 「변신」을 시작했다. YS 대선자금에 관한 입장을 필요에 따라 바꾸는가 하면 「대표 프리미엄」을 철저히 활용하는 정치감각을 드러냈다. 한 측근은 『이대표가 대표 자리를 7월1일에 내놓은 것은 대표직의 이점을 최대한 살린 뒤 합동연설회에서 반이회창 진영의 집중포화를 비켜간, 절묘한 선택이었다』고 말했다. 정치인 이회창의 오늘이 단순히 「YS 치받기」에 의한 것이 아님을 알려주는 대목이다. 바로 이런 놀라운 적응력이 아무런 기반없이 「단기필마(單騎匹馬)」로 당에 들어와 불과 1년반만에 집권당 대통령후보를 거머쥐는 신화(神話)를 가능케 했다는 해석에는 그의 측근들도 토를 달지 않는다. 〈박제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