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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의 거산 김영삼 전 대통령의 명복을 빌며

민주화의 거산 김영삼 전 대통령의 명복을 빌며

Posted November. 23, 2015 0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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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와 부정부패 척결에 앞장섰던 김영삼 전 대통령이 어제 8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6년 전 먼저 세상을 떠난 고() 김대중 전 대통령과 함께 민주화를 이끈 두 정치 거목은 이제 역사 속으로 들어갔다. 산업화가 박정희의 리더십에 힘입은 것이라면 민주화는 양김과 김수환 추기경의 투쟁과 리더십에 힘입은 결과였다.

그는 독재정치의 위협에 위축되거나 굴하지 않았다. 김 전 대통령은 박정희 대통령의 3선 개헌 반대의 선봉에 서다가 서울 상도동 자택 골목에서 초산테러를 당했다. 1979년에는 신민당 총재로 선출됐지만 직무집행 정지와 함께 국회의원직을 제명당하자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고 외쳤다. 1212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전두환 정권 시절 두 차례 자택연금을 당하고, 1983년 광주민주화운동 3주년 때는 민주인사 석방을 요구하며 23일 간 목숨을 건 단식을 벌였다. 그의 민주화 투쟁은 1985년 212총선 신민당 돌풍과 1987년 직선제 개헌운동으로 이어져 마침내 정치군부의 대 국민항복 선언인 629로 이어졌다. 대한민국의 민주화가 한때 거리 투쟁에 앞장섰던 일부 운동권 출신 정치인들의 전유물일 수 없는 이유다.

1990년 3당 합당은 한국정치사에 지역구도 정치의 어두운 그림자를 남겼다는 비판이 나올 만큼 평가가 엇갈린다. 그럼에도 30여 년간 지속됐던 군사정권을 실질적으로 종식시키고 문민정부를 탄생시킨 것은 물론이고 시대적 과제인 민주화와 개혁을 결단으로 실천한 그의 업적은 결코 과소평가될 수 없다. 무엇보다 김 전 대통령은 군내 사조직인 하나회를 척결하고 1212군사반란과 광주민주화운동을 총칼로 짓밟은 전두환노태우 신군부 세력을 단죄함으로써 군의 정치개입을 근본적으로 차단했다.

김 전 대통령은 공산주의 몰락과 개방화의 흐름 속에서 낡은 제도관행을 타파하고 산업화 민주화 이후의 시대적 과제로 떠오른 세계화를 통해 성장의 한계에 봉착한 한국병을 치유하기 위해 노력했다. 1993년 모든 금융거래를 실명으로 하도록 의무화한 금융실명제와 부동산실명제의 실시는 가명, 차명, 무기명 같은 잘못된 금융거래 관행과 음성소득, 불로소득이 풍미하던 지하경제를 지상으로 끌어올렸다.

실명제 실시는 불법 정치자금을 비롯한 정치부패 공직부패를 제도적으로 타파하고 투명 경제를 통한 신뢰사회 구축에도 크게 기여했다. 김 전 대통령은 집권 초부터 반부패 제도화와 함께 성역 없는 사정을 기치로 내걸었다. 김 전 대통령은 공직자윤리법을 제정해 고위 공직자 재산 공개를 실시하고 통합선거법과 정치자금법 제정으로 돈은 묶고 입은 푸는 식의 정치개혁을 추진했다. 임기 말 차남 현철씨가 헌정사상 현직 대통령의 아들로는 처음으로 구속돼 개혁의 빛이 바랜 측면이 있지만 그의 공적 전체를 가릴 수는 없다. 지방자치제 실시로 풀뿌리 민주주의의 시대를 열어 중앙집권 세력이 갖고 있던 권력의 상당부분을 지방으로 넘겼다.

김 전 대통령은 폭넓은 용인술로 많은 인재들을 정치권에 영입했다. 노무현이명박 전 대통령을 비롯해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 이인제 최고위원, 손학규 전 민주당 대표, 이재오 의원 김문수 전 경기지사, 홍준표 경남지사 등 여야에 영향력이 큰 정치인들을 발탁해 능력을 발휘할 기회를 줬다. 김 전 대통령의 개방적 인재관은 계파의 울타리를 뛰어넘지 못하고 갈등하는 지금의 여야 정치권에 적잖은 시사점을 준다.

김 전 대통령 재임기간은 1차 북핵 위기가 불거진 때였다. 그는 취임사에서 어느 동맹국도 민족보다 더 나을 수 없다고 선언하고 취임 직후 비전향 장기수 이인모를 북에 송환했다. 하지만 북은 NPT(핵확산금지조약) 탈퇴와 핵 개발로 나갔고 김 대통령은 결국 핵 가진 자와는 악수도 하지 않겠다며 태도를 바꿨다. 1994년 6월 미국이 북한 영변핵시설 폭격을 검토하면서 북핵위기는 최고조에 달했다. 당시 미국 빌 클린턴 행정부의 영변 폭격 계획을 김 전 대통령이 반대한 것은 한반도 전쟁 발발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지금 다시 그 상황이 와도 판단하기 쉽지 않은 문제다. 김영삼정부 시절 대북정책이 오락가락한 것은 북이 노태우 정부 시절 체결한 남북기본합의서와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에도 불구하고 국제사회를 속이고 핵개발을 계속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선의로 대한다고 4차 핵실험 운운하는 북까지 진심으로 나오는 것은 아니라는 교훈은 오늘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김영삼 정부 임기 말 초래된 사상 초유의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신청은 김 전 대통령의 최대 실정()으로 국민 속에 각인돼 있다. 한국 경제는 1980년대를 보내며 저비용과 고생산성의 시대가 지나고 본격적인 경쟁력 위기를 맞던 시점이었다. 신발 의류 가죽 악세사리 같은 전통 수출업체들이 문을 닫거나 해외로 나갔다. 김 전 대통령도 취임사에서 고비용-저효율의 한국병을 고쳐야 한다고 진단했지만, 공공부문과 기업구조, 노동시장 개혁을 위한 정교한 정책과 입법은 끝내 이뤄내지 못했다.

김 전 대통령 시절 1인당 국민소득은 1만 달러를 넘고 종합주가지수는 1000을 넘었다. 경제성장률이 1995년 9.2%, 1996년 7%로 호황을 누리자 정부는 자신만만했고 1996년 말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을 계기로 금융시장을 과감하게 개방해 나갔다. 경제의 깊은 곳이 썩는 줄 모르고 눈앞에 보이는 화려함에 취해 샴페인을 너무 일찍 터트린 것이 국가부도 사태의 원인이었다.

1997년 한보그룹 부도를 신호탄으로 삼미 진로 기아차 등이 연달아 부도나고 국제신용평가사들이 한국에 대한 신용등급을 잇따라 낮추면서 외채상환 연기가 불가능해짐에 따라 결국 IMF 구제금융에 손을 내밀 수밖에 없었다. 강력한 경제리더십으로 사태를 수습해야 할 시기임에도 김 전 대통령은 1995년부터 외환위기 때까지 경제부총리와 대통령경제수석비서관을 78개월마다 계속 갈아 치웠다. 외환위기는 빚잔치로 기업을 경영한 대기업들과, 집단이익을 위해 기업구조조정을 막은 노조와 야당에도 책임이 없지 않다. 그럼에도 개방을 서두르면서 정작 수많은 당사자들의 이해관계를 조정하지 못한 정부에 가장 큰 책임이 있다. 그 이면에는 정치 감각은 뛰어났지만 경제에는 공부가 부족했던 김 전 대통령과 현실을 직시하도록 대통령을 보좌하지 못한 관료주의가 있다.

지금 한국경제는 세계 경제의 패러다임이 바뀌면서 한국 기업들의 경쟁력이 급속히 떨어지는 고비용 저효율이 심화되고 있다면 점에서 김영삼 정부 때와 닮은 측면이 있다. 미국의 금리 인상으로 신흥국부터 금융 쓰나미가 올 수 있다는 상황도 비슷하다. 단기 외채가 큰 문제였던 당시와는 다르기 때문에 당장 급성위기가 올 개연성은 낮지만 장기 불황으로 경제가 점점 나락으로 빠져들 가능성은 더 높아졌다. 정부의 개혁 리더십이 실종되고, 야당과 노조는 대안 없이 반대만 하는 작금의 경제상황에서 정치지도자들은 김 전 대통령의 실패를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

다른 대통령과 마찬가지로 김 전 대통령에게도 공과가 있다. 그러나 당면한 신한국병을 타파하기 위해 고통을 분담하자며 칼국수로 상징되는 개혁에 앞장섰던 김 대통령을 국민은 오래도록 기억할 것이다. 먹구름이 몰려오는 경제와 왜소한 정치의 무기력증이 대한민국의 좌표를 걱정하게 만드는 오늘의 상황에서 김 전 대통령이 보여줬던 개혁가, 실천가의 면모는 긍정적인 유산으로 계승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