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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병은 사라졌지만, 정신은 죽지 않았다 (일)

노병은 사라졌지만, 정신은 죽지 않았다 (일)

Posted February. 10, 2010 0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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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발발 60년이 지났지만 북한은 여전히 핵개발의 욕심을 버리지 않고 있다. 더욱이 강성대국을 건설하겠다며 서해안에서의 군사적 도발을 서슴지 않고 있는 상황이다.

전쟁 당시 연합군을 지휘했던 더글러스 맥아더 전 유엔군 최고사령관을 추모하기 위해 만든 맥아더 기념관을 지난달 7일 찾았다. 워싱턴에서 자동차로 3시간 거리에 위치한 버지니아 주 남부 군항() 노퍽 시에 있는 이곳에는 미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군인 중 한 명으로 추앙받고 있는 맥아더 장군의 모든 것이 보존돼 있다. 250만 점의 문서와 20만여 권의 장서, 8만6000여 장의 사진과 8000여 점의 유품 등이 맥아더 사령관이 남긴 위대한 유산을 증언해 주고 있었다. 맥아더 사령관이 52년간 국가를 위해 봉사한 정신을 기리기 위해 노퍽 시가 제공한 옛 시청 석조건물은 연간 7만 명 이상의 국내외 관광객이 찾는 명소. 현재 별개의 건물인 극장과 기념품점을 연결해 첨단 건물로 증축하고 있다.

기념관에 들어서면 맥아더 사령관과 부인 진 맥아더 여사의 무덤이 있다. 맥아더 사령관이 이곳에 묻힌 날은 1964년 4월 11일. 13년 전인 1951년 트루먼 대통령에 의해 유엔군 최고사령관직에서 해임되던 날과 똑같다. 2000년 1월 22일 사망한 맥아더 사령관의 부인 진 여사는 나흘 뒤 남편 곁에 묻혔는데, 이날은 맥아더 사령관의 출생일(1880년 1월 26일)과 같다. 홀의 한가운데에는 625전쟁 당시 유엔군 최고사령관기와 미 육군 역사상 넷밖에 오르지 못했다는 5성 장군 깃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극동군 총사령관기가 있다.

1층 왼쪽의 625전쟁 관련 전시관 내 625전쟁 당시의 전황을 소개한 한반도 지도에는 동해(East Sea)라는 표기가 선명했다. 기념관 측은 약 7년 전 당시 주미 한국대사가 이곳을 찾아 일본해라고 표기된 데 문제 제기를 했다며 대사관과 한국 정부가 아예 동해라는 표기가 있는 유리패널을 제작해 와 기증했다고 말했다. 10년 전인 2000년 625전쟁 발발 50주년 당시 한국과 미국 정부가 공동으로 제작한 기념기도 전시돼 있다. 이 깃발에는 FREEDOM IS NOT FREE라는 영어 문구와 자유는 아무런 노력 없이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라는 한국어 문구가 병기돼 있다.

이승만 대통령이 맥아더 사령관에게 주었다는 청동 향로도 눈에 띄었다. 맥아더 사령관의 아버지인 아서 맥아더 2세는 1890년대 조선을 방문했을 때 고종에게서 향로를 하사받은 적이 있다. 아버지의 유물을 보존하던 맥아더 사령관은 1942년 5월 필리핀 내 연합군 사령부가 일본군에 함락되는 와중에 향로를 분실하고 만다. 나중에 이를 안 이승만 전 대통령은 모양이 비슷한 향로를 구해 맥아더 사령관에게 선물했다. 기념관은 이 대통령과 한국민들이 1948년 대한민국 독립정부 수립 기념으로 이 선물을 선사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맥아더 기념관의 사료실장 제임스 조벨 씨는 맥아더 사령관의 취미는 독서였고 하루에 3시간씩 책을 읽었다고 말했다. 기념도서관에 보관된 20만 권의 장서 중 5000여 권은 맥아더 사령관 개인 책. 맥아더 사령관의 회고록(Reminiscences)의 친필원고도 만날 수 있었다. 노란색 대학노트 900쪽에 1961년부터 2년 동안 연필로 눌러 쓴 맥아더 사령관의 필체는 힘이 있으면서도 고상한 기품이 흘러 넘쳤다.

맥아더 사령관은 1962년 5월 12일 웨스트포인트(육군사관학교)를 찾아 의무, 명예, 조국(Duty, Honor, Country)이라는 제목의 연설을 했다. 그는 군인은 어느 누구보다도 평화를 위해 기도한다. 그 이유는 군인이 전쟁으로 인한 가장 깊은 상처와 흉터를 아파하고 그 고통을 감내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또 맥아더 장군은 자유를 지키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지 않는 사람은 자유를 누릴 자격이 없다고도 했다. 그가 남긴 평화와 자유에 대한 메시지는 오늘도 여전히 유효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