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 to contents

인민군 총공격 제보로 간첩누명 재미교포 62년만에 재심 받는다 (

인민군 총공격 제보로 간첩누명 재미교포 62년만에 재심 받는다 (

Posted June. 20, 2012 05:42,   

日本語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9월 북한군의 총공격 계획을 국군에 제보했는데도 오히려 간첩으로 몰려 5년간 복역한 재미교포 홍윤희 옹(82사진)이 62년 만에 재심을 받게 됐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1부(부장판사 이원범)는 홍 옹이 1950년 국방경비법 위반 혐의로 기소돼 부산중앙계엄고등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 받았던 사건에 대해 유죄 부분에 관해 재심을 개시한다고 7일 결정했다. 재판부는 홍 옹이 입수한 미국 국방성의 홍의 정보(The Hongs Infomation)라는 문건에 대해 무죄를 인정할 명백한 증거가 새로 발견된 때에 해당해 재심 사유가 된다고 설명했다. 홍 옹은 동아일보 기자와의 통화에서 나는 대한민국을 구했다고 생각하는데 국가를 위해 일하고서도 전과자로 남을 순 없었다며 평생을 걸고 진실을 밝혀 명예를 회복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홍 옹은 20세였던 1950년 6월 보병학교 간부 후보생으로 입교하기 위해 잠시 서울 육군본부 감찰실에서 대기 중이었다. 그 때 갑자기 625 전쟁이 터져서 홍 옹은 서울을 빠져나가지 못하고 중구 신당동에 있던 고향 친구 집에 숨어들었다. 하지만 그 친구가 공산당원이어서 어쩔 수 없이 그해 7월 의용군에 입대했다. 나중에 탈출한 생각으로 들어간 의용군에서 홍 옹은 깜짝 놀랄 정보를 얻는다. 인민군이 9월에 총공격을 펼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홍 옹은 9월 1일 탈출을 해서 국군에 귀순했다.

홍 옹은 총공격 계획을 국군에 제보한 뒤 유엔군사령부에서 장시간 브리핑까지 했다. 하지만 9월 11일 부산에서 갑자기 간첩 혐의로 헌병에 연행됐다. 이후 인민군이 서울에 침입할 당시 후퇴명령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국군에서 이탈해 국군과 교전을 벌였다는 혐의로 사형을 선고 받았다. 이후 두 차례 감형을 통해 1955년 출소할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온갖 고문을 당하기도 했다.

출소 후 그는 재심을 받는 방법을 모색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휴전 직후라서 간첩혐의를 받은 사람에 대해 선처를 해 주는 사회적 분위기가 있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결국 홍 옹은 간첩 누명을 벗지 못한 채 1973년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미국에서 홍 옹은 일본 사학자 고지마 노보루()가 쓴 조선전쟁에서 인민군 소좌 김성준이 투항해 인민군의 총공격을 제보했다는 대목을 접하고 다시 누명 벗기에 나섰다. 미국 로이 애플먼 전사, 일본 고지마 전사, 미국 국립문서보관소와 부산 용호동 문서보관소 등을 통해 관련자료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지난해 국사편찬위원회에서 간부후보생 홍(Hong)이 인민의용군에서 탈출해 1950년 9월1일 새벽 가산 인근에 주둔한 아군에 귀순, 인민군이 열흘 안에 부산을 점령하는 것을 목표로 총공격을 감행할 계획임을 알렸으며 미군이 이를 중요 정보로 취급했다는 정황이 담긴 메모를 발견했다. 미국 국방성 산하 미군역사국 한국전쟁사 집필자인 애플멘(Roy E. Appleman)이 1954년 3월 5일 작성한 일명 홍의 정보라는 문건이었다. 이 문건을 입수한 후 홍 옹은 재심을 청구했다.

홍 옹은 이 사건은 나 개인의 명예회복을 넘어선 역사적 사건이라며 재심이 빨리 개시되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말했다.



김성규 sunggyu@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