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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만원도 뻘쭘 체면 차리다 허리 휜다

Posted May. 29, 2008 0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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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도 국민연금 받은 돈이 경조사비로 다 나갔습니다.

국내 유수의 시중은행에서 지점장을 지내다 2002년 은퇴한 이모(58) 씨. 그의 한달 생활비는 2년 전부터 받고 있는 국민연금 56만 원에 저축인출을 합해 200만 원을 남짓이다. 그는 지난달에만 각종 경조사비로 생활비의 55만 원을 썼다.

이 씨는 은퇴 후 좋아하던 골프는 끊었지만, 결혼을 앞둔 세 자녀를 생각하면 경조사비 지출만은 끊을 수 없는 형편이다.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2인 이상 전국가구의 지난해 지출한 경조사비는 평균 51만9000원, 지난 한 해 국민들이 경조사비에 사용한 돈은 7조6681억 원이었다. 관련 통계가 있는 2003년 이후 4년간 2인 이상 가구의 경조사비 지출액 증가율은 18.7%로, 같은 기간 소비자물가 상승률(11.6%)보다 빨랐다.

경조사비 지출액이 물가상승률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오르면서 가계운용에 큰 부담을 주고 있다. 상호 부조()라는 본래의 의미를 되찾기 위해서라도 경조사비 문화가 하루빨리 바뀌어야 한다는 지적이 많다.

기준 금액 10만 원까지 오르나

본보 취재팀은 올해 5월 결혼한 회사원 직원 A(30서울) 씨의 축의금 장부를 금액별로 분석해봤다. 하객 중 약 절반이 5만 원을 냈고 10만 원을 낸 사람은 3명 중 1명꼴이었다. A 씨는 호텔이 아닌 서울 시내의 한 평범한 예식장에서 혼사를 치렀다.

1999년 2월 결혼한 B(41) 씨는 A 씨의 회사 선배로 둘은 결혼시점에 거의 비슷한 사회적 위치다. B씨의 축의금 장부를 보면 전체의 약 절반이 3만 원이었다. 표 참조

이처럼 한국의 축의금액에는 일정한 패턴이 있다.

친분도가 조금 떨어지지만 모른 척할 수 없을 경우에 내는 낮은 금액, 가장 보편적인 기준금액, 꽤 친밀한 상대에게 내는 높은 금액의 3단계가 그것이다. 이를 넘는 것은 이른바 고액축의금에 속한다.

A, B씨 경우를 비교해보면 9년이 지났지만 3단계의 패턴이 그대로 유지됐고 단계별 비중에도 큰 변동이 없었으며 금액분포만 9년 전 2만, 3만, 5만 원에서 3만, 5만, 10만원으로 바뀌었음을 알 수 있다.

이를 단순비교하면 9년간 낮은 축의금은 50%, 기준 축의금은 67%씩 각각 올랐다.

또 높은 축의금은 5만 원에서 10만 원으로, 고액축의금 기준은 10만 원 이상에서 20만 원 이상으로 갑절이 됐다. 1999년 2월부터 올 5월까지 소비자물가가 31.5% 오른 것과 비교하면 그간의 축의금 인플레이션은 물가상승률의 23배 수준으로 추산된다.

게다가 A, B씨의 축의금 분포로 봤을 때 낮은 금액의 비중은 축소됐고, 높은 금액의 비중이 상대적으로 팽창해 있어 기준금액이 5만 원에서 10만 원 쪽으로 강한 상승 압력을 받고 있다고 유추할 수 있다.

사회변화 못 따라가는 경조사비 문화

예비역 소장 A(61) 씨는 6년 전 전역했지만 경조사를 챙겨야 할 사람들이 아직 많다. A 씨는 결혼 성수기인 요즘엔 많을 때는 한 주에 10건이 넘게 챙긴 적도 있다. 경조사비 부담 때문에 이민가고 싶다는 예비역 동기들도 많다고 전했다.

외환위기 이후 상시 구조조정으로 은퇴가 빨라진 데다 수명은 늘어나 과거 10년 남짓했던 은퇴 후 기대 여생이 2030년으로 크게 늘었다. 노년에 고정소득 없이 경조사비를 부담해야 하는 기간이 훨씬 길어진 것이다.

전통 농경사회에서는 경조사비가 어려울 때 서로 돕는 상호부조 또는 사회보험 성격이 짙었지만 도시화와 개방화로 공동체의 범위가 불분명해지면서 주고받기 원칙이 무너지고 있다.

예컨대 이직, 퇴직을 하면 돌려받기가 힘든 것. 자연히 권력을 가진 쪽에 돈이 몰리고 사회적 약자일수록 손해를 보는 불평등한 구조로 변질됐기도 했다.

중앙대 신인석(경제학) 교수는 경조사비를 내는 것은 내가 이 모임(그룹)에 속해있다는 신호를 보내거나 때로는 이를 과시하는 수단이 되기도 했다며 부조에 네트워크 구축 기능이 추가됐다고 말했다. 잘 알지도 못 하는 사람의 행사에 참석하거나 축의금만 내고 정작 식장에는 들어가 보지도 않는 관행도 이와 무관치 않다.

결혼식 화환 대신 쌀 봉투를 받아 불우이웃을 돕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등 변화의 조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낡은 경조사비 관행을 바꾸기는 아직 역부족이다.

성신여대 강석훈(경제학) 교수는 경제적 능력, 친소() 관계를 가리지 않는 경조사비 문화는 우리 사회의 대표적 거품이라며 한국사회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하기 위해 사회의 리더들이 노블레스 오블리주 차원에서 이를 걷어내는데 앞장서야 한다고 말했다.



유재동 장원재 jarrett@donga.com peacechao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