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레이 반도 출신 마리얌(87한국명 김순애) 할머니는 9일 오전 10시 경기 남양주시 별내면사무소에 마련된 투표소에 들어가기 전 가방을 뒤적였다.
중요한 건데 잊어버리면 안 되지 하며 주민등록증이 있는 것을 확인한 뒤에야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백발의 마리얌 할머니는 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대한민국 국민으로 첫 투표권을 행사했다. 1943년 싱가포르의 일본군 수용소에서 만난 한국인 근로자를 따라 1946년 한국 땅을 밟은 지 62년 만이다.
그는 1955년 남편에게 버림 받은 뒤 한국에서 이방인으로 살아왔다. 김치와 고추장을 좋아하는 진짜 한국인이라는 생각에 선거 때마다 투표소도 찾았지만 주민등록이 돼 있지 않아 번번이 되돌아와야 했다.
마리얌 할머니는 지난해 12월 귀화를 허가받고, 올해 1월 말 주민등록증을 손에 쥐며 소박한 꿈을 이뤘다. 고혈압과 심장판막증 등 지병을 앓고 있는 데다 최근에는 9개월여 동안 병원 신세를 질 만큼 건강이 악화돼 이번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투표였다.
선거인 명부에는 마리얌 빈티조하리라는 이름이 있었다. 선거 안내 요원이 글씨를 읽지 못하는 할머니에게 이름을 읽어 주며 본인 맞으시죠?라고 묻자 반갑게 고개를 끄덕였다.
두 장의 투표용지를 받아든 할머니는 상기된 표정으로 기표소를 나오며 생각보다 금방 끝나버렸네라며 아쉬워했다.
마리얌 할머니는 우리나라 잘돼야지. 싸우지들 말고. 그래야 다들 잘살지. 내가 얼굴 아니까 당선되면 잘하는지 보겠다며 지갑 속에 넣어둔 후보자의 명함을 꺼내 봤다.
중국 흑룡강 성에서 온 조선족 강영조(59) 씨도 이날 처음으로 투표소를 찾았다.
강 씨는 2005년 7월 한국에 입국해 지난해 5월 귀화 허가를 받았지만 지난해 12월 대통령선거 때는 부산의 건설 현장에 내려가 투표를 하지 못했다.
그는 오전 9시 서울 관악구 봉천6동 원당초등학교에서 투표를 마치고 나오며 이제야 진짜 대한민국 국민이 된 것 같다고 말했다.
강 씨는 귀화 중국 동포들의 모임인 귀한동포연합회에서 고충처리실장을 맡아 새내기 동포들의 도우미를 자처하고 있다. 그들의 애로사항을 듣고, 도움을 줄 수 있는 개인이나 단체를 연결해 주는 게 그의 역할이다.
강 씨는 어느 정당과 후보가 개방적인 이민정책을 지지하는지 신중히 투표하기 위해 중국 동포 지인들과 회의도 열었다며 당선된 의원들이 어려운 여건에서 생활하는 중국 동포들의 권익을 생각해 주면 좋겠다고 말했다.
경기 안성시에 있는 새터민 청소년들도 처음으로 투표에 참가했다.
지난해 10월 탈북해 새터민 청소년을 위한 대안학교인 한겨레고 3학년에 재학 중인 김모(22여) 씨 등 새터민 학생 4명은 이날 곽종문(51) 교장 등 인솔교사 10여 명과 인근 광선초교에서 한 표를 행사했다.
김 씨는 남한에서의 투표가 익숙지 않아 어색하기도 했지만 학교에서 모의투표를 해 봤기 때문에 큰 어려움은 없었다고 말했다.
경기 광주시 퇴촌면 나눔의 집에 살고 있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 5명도 이날 오전 9시 반 퇴촌면사무소를 찾아 투표했다. 2004년 17대 총선 때 11명의 할머니가 투표에 나선 것과 비교하면 절반도 안 되는 인원이다.
올해 들어서만 문필기 지돌이 할머니를 비롯해 4년간 4명의 할머니가 숨을 거뒀다. 이날도 최고령자인 박옥련(88) 할머니와 김군자(82) 할머니는 몸이 아파 참여하지 못했다.
안신권 나눔의 집 사무국장은 할머니들의 연세가 워낙 많아 다음 총선 때는 몇 분이나 투표를 할 수 있을지 걱정이다며 그래도 할머니들은 새로 뽑힌 국회의원들이 위안부 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해 주기를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편 광주 북구 건국동 키즈어린이집 투표소에는 올해 110세인 최양단 할머니가 며느리의 도움을 받아 소중한 한 표를 행사했다.
최 할머니는 택시운전사들로 이뤄진 광주무료차량봉사대가 제공한 차량을 타고 무사히 투표장에 도착했고, 투표소 안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박수를 치며 환영했다.
최 할머니를 50년 동안 모시며 효부상을 받은 며느리 심판례(72) 씨는 어머님이 지난 평생 동안 한 번도 거르지 않고 투표를 하셨다며 아직도 정정하셔서 이렇게 투표를 할 수 있어 다행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