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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의 빛이 되어준 너

Posted September. 15, 2004 22:05,   

내 삶의 빛이 되어준 너

내신은 늘 1등급이지만 각종 경시대회에선 절대로 1등을 못하는 수험생 같은 감독이 바로 토니 스콧이다. 마지막 보이스카웃(1991년) 에너미 오브 스테이트(1998년) 스파이 게임(2001년) 등을 연출한 그에겐 거의 예외 없이 기대한 만큼을 완벽하게 보여주지만 늘 딱 그만큼이란 것이 장점이자 한계로 지적돼 왔다. 아마 그건 빠른 속도감과 감각적인 화면, 꽉 짜여진 이야기로 긴장을 조성하는 데는 그가 천재적인 재능을 보이지만 스타일화 되지 않은 인간의 정직한 감정에 솔직하게 기대는 경우는 드물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점에서 스콧 감독의 신작 맨 온 파이어(Man On Fire)는 올해로 60세가 된 그의 작지만 중대한 변화를 감지케 하는 영화다. 그는 이 영화를 통해 이성간 사랑이 아니라도 그저 따스해서 목숨과도 맞바꿀 만한 사랑(혹은 우정)이 있다는 걸 이야기하려 한다. 이런 감정은 트루 로맨스(1993년)의 미친 사랑도, 탑건(1986년)의 잘난 체하는 사랑도 아니다.

미국 중앙정보국(CIA)의 전문 암살요원 출신 존 크리시(덴젤 워싱턴)는 킬러가 떠안는 죄책감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술에 의지한다. 그는 친구 레이번(크리스토퍼 월컨)의 권유로 멕시코인 사업가 사무엘의 9살짜리 딸 피타(다코타 패닝)의 보디가드가 된다. 크리시는 따뜻함을 간직한 소녀에게 점차 마음의 문을 연다. 어느 날 크리시는 괴한들의 총격을 받고 쓰러지고 피타는 유괴된다. 의식을 회복한 크리시는 피타가 살해당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크리시는 범행 뒤에 숨은 진실의 껍질을 하나하나 벗겨가며 잔혹하고도 고독한 복수를 시작한다.

맨 온 파이어는 보디가드와 어린 소녀의 우정과 사랑이라는 신파에 가까운 저변의 감정을 CF나 뮤직비디오와 흡사한 세련된 비주얼을 통해 전달한다. 기동성을 높이는 16mm 카메라, 두세 개의 이미지를 한데 포개는 다중노출, 대사 속 일부 단어를 화면에 자막으로 강조하는 방식 등을 통해 주인공의 심리적 동요와 긴장을 형상화한다.

그러나 스콧 감독은 할리우드 만년 모범생으로서의 한계를 여전히 드러낸다. 술과 성경을 번갈아 쳐다보면서 갈등하는 크리시의 모습은 그의 복합적 내면을 드러내기엔 지나치게 얄팍한 상징이다. 침묵의 힘과 매력을 줄곧 보여주던 크리시가 막판 복수극에 접어들면서 복수는 차게 먹어야 맛있는 음식과 같다며 멋진 척하는 수사를 남발하는 것도 할리우드 복수 액션극의 장르적 법칙이 캐릭터의 일관성을 깨뜨린 경우다. 켜켜이 쌓아온 크리시와 피타의 소중한 사연들에 비해 크리시의 복수 행위는 딱딱하게 정형화돼 있을 뿐 아니라 그리움의 냄새도 부족하다.

아역배우 패닝은 아이 앰 샘에 이어 이 영화에서도 소녀인지 숙녀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에메랄드빛 눈동자를 보여준다. 그에겐 만지면 연기처럼 사라질 것만 같은 신비감이 있다. 24일 개봉. 15세 이상 관람 가.



이승재 sjd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