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까지 포장도로 나고 포구까지 자동차가 들어오기는 하나 그래도 이 곳은 오지다. 시내버스도 하루 한 차례 뿐이고 인터넷이 연결됐다고는 하나 통신라인에 연결하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
통영과 사이에 다리가 두 개나 놓여 육지나 다름없는 연륙도가 된 지도 오래. 덕분에 섬사람 성정속에 깊이 배인 고립과 외로움, 억척스럼은 사라지고 남을만도 한데.
그래도 본디 이 곳은 육지를 등진 바다 가운데 섬. 거기서도 이곳 여차마을(거제시 남부면 여차리)처럼 섬 한 켠에 꼬옥 박힌채 외지와 접촉이 쉽지 않은 갯가 사람들은 여지껏 바다만 쳐다보고 살아온지라 지금도 그들의 말과 행동에는 섬사람의 풋풋함이 남아 있는 듯 했다.
거제 섬에서도 거의 맨 아래, 땅끝 언저리. 포장도로는 예서 끝나고 비포장도로가 마을 뒤편 숲길을 지나 바다로 돌출한 마을 오른편 절벽위 높은 언덕을 기어 오른 뒤 그 너머 해안의 홍포를 지나 멀리서 14번 국도와 연결된다. 이렇듯 외진 탓에 자동차로 불과 10여분 거리의 학동은 해상농원 들어선 외도바람에 유명세를 탔지만 이 마을은 여지껏 잘 알려지지 않았다. 그래도 홍포와 여차 두 마을 사이의 까마귀재에서 바라다 보는 기막힌 바다풍경은 입소문 난지 오래인 탓에 띄엄띄엄 외지 차량이 마을을 찾아온다.
거제도 남단의 몽돌해안. 뭍에서 온 여행자의 지칠줄 모르는 호기심을 채워주기에 모자람이 없는 명물이었다. 셀 수 없이 많은 그 돌멩이 중에는 정말로 모난 놈이 하나도 없다. 작으나 크나 동골동골 매끈매끈 한 것이 꼭 우리 아이 세 살적 보드란 피부의 주먹 같았다.
저 바람에 시달리다 보면 이리 되고도 남을 것이려니. 시도 때도 없이 해안으로 불어오는 바닷바람은 세차고 거칠었다. 그 바람에 일어나는 파도는 더 말할 나위 없을 터.
몽돌해안을 걷다 보니 숲뒷편 언덕에 두 세가구가 어울린 한개라는 마을이 있었다. 계곡 사이로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언덕에 팜트리(야자수) 몇그루를 심어둔 이 곳. 별장 지으면 안성맞춤일 전망좋은 곳이었다.
여차마을에서 시작된 비포장도로는 이 마을입구를 지나 까마귀재까지 이어졌다. 길 왼편은 까마득한 절벽. 그 아래로 한개 여차 두 마을과 그 앞 몽돌해변, 그리고 파도 쉼없이 밀어내는 파란 남해바다가 한 눈에 내려다 보였다.
몸이 날아갈 정도로 세찬 바람이 몰아치던 고개 마루. 정면으로 숨이 턱하고 막힐 정도로 아름다운 남해의 풍경이 시원스레 펼쳐졌다. 왼편에 대병도, 오른편에 매물도 소매물도. 소매물도 언덕의 작은 등대가 물안개에 가려 아스라이 보였다. 그 앞 작은 섬은 어유도. 사람 살지 않는 소병대도가 그 앞에 굳건히 포석하고 그 오른쪽 뒤편에 가왕도가 보였다.
마을로 돌아오는 길. 몽돌해안에서 이제 막 물질을 마쳤는지 물이 뚝뚝 떨어지는 잠수복을 입은채 머리에 한 짐 얹고 걸어가는 해녀를 만났다. 미소지어 인사건네는 해녀(정형연씨49)에게 많이 잡았냐고 인사치레를 했다. 그랬더니 이따 오이소하며 손가락으로 집을 가리켰다. 마을 한가운데 민박을 겸한 2층집 여차회집(055-633-1332)이었다.
안그래도 차고 끈끈한 바닷바람 맞은 뒤에 소주 한잔이 간절하던 참인데. 따끈한 이 집 안방에 상펴고 막 삶은 고동의 속내를 이쑤시개로 빼먹는 맛. 갯가에서나 맛보는 호강이었다. 바깥주인(김용득씨54)에게 소주잔을 건네며섬마을 이야기를 청했다. 부부는 여차마을 토박이. 돌미역은 해저 34m에서 자라는 자연산으로 근방의 섬과 해안에서 거두는데 바위틈의 수초를 쳐내 주어야만 거기서 자란단다. 그래서 12월이면 온 주민이 바다로 나가 추위속에 작업한다고 했다. 돌미역 수확철은 지금부터. 마을앞 몽돌밭이 널어 말리는 돌미역으로 시커멓게 뒤덮일 날도 머지 않았단다.
오지라해도 한여름에는 피서객들로 몸살을 앓는다고 했다. 몽돌해변이 몽땅 텐트로 덮이는 터라 주민들 낚싯배까지도 피난을 간단다. 그러나 그날 마을은 그리도 한가할 수가 없었다. 파도소리 들으며 든 잠, 역시 파도소리 들으며 깼다. 아침이 밤과 다른 점이라면 새소리가 있다는 것. 청아한 새 울음소리가 파도소리와 겹쳐 음악처럼 들려왔다. 그 후렴으로 몽돌 구르는 소리는 여전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