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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살아있다]제4장 신해혁명과 민중 운동(하

[역사는 살아있다]제4장 신해혁명과 민중 운동(하

Posted October. 28, 2007 15:11   

목소리 높이는 민중들의 연쇄

조선31독립 운동, 중국54운동 / 다이쇼()데모크라시

제1차 세계대전과 민족자결

1914년 7월부터 1918년 1월까지, 유럽을 중심으로 약 30개국이 참전한 제1차 세계대전은 종결을 맞이했다. 윌슨 미국 대통령은 14개조의 평화 원칙을 제안했다. 그 중의 하나가 민족자결의 원칙이다. 각 민족의 발전은 외부로부터의 간섭 없이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는 것을 국제적으로 보장한다는 것이었다. 전후 처리를 둘러싼 1919년 파리 강화 회의는 14개조의 원칙을 기본으로 했다. 일본의 식민지하에 있던 조선과 청도(青)의 반환을 요구한 중국에서 기대감이 높았으나 비유럽 권에는 적용되지 않았다. 조선, 이집트, 인도 등에서는 민족 운동이 고조되는 결과를 가져 왔다.

3•1 독립 운동

일본의 통치 하에 있던 조선 각지에서 1919년 3월 1일부터 전국적인 항일 독립 운동이 시작되었다. 민중들이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 만세를 외치면서 데모 행진을 했다. 이로 인하여 만세 사건(운동)이라고도 불린다. 종교 지도자 등이 사전 준비를 하여, 서울, 평양 등지에서 동시에 일어났다. 서울에서는 중심부인 탑골 공원(구 파고다 공원)에 모인 민중 앞에서 독립선언서를 선포하고 데모 행진을 시작하였다. 약 3개월 동안에 걸쳐 전국적으로 전개되었지만, 일본군의 탄압에 의해, 주민을 예배당에 감금해 불을 지르는 등 약 30명을 학살한 제암리 사건 등이 일어났다. 일련의 운동을 둘러싸고 사망자 7509명, 부상자 1만 5961명 외에, 4만 6948명이 투옥되었다. (박은식 저 조선 독립 운동의 혈사). 조선에서의 노동 운동, 농민 운동, 여성 운동 등의 원점이 되었다.

한국에서의 3월 1일과 중국에서의 5월 4일은 커다란 의미를 가진다. 1919년은 2개월 사이에 3•1 독립 운동과 5•4 운동이라는 대규모 민중 운동이 일어났다. 모두 일본의 제국주의에 대한 반발이었다.

한국에서는 매년 기념식전이 열리고 대통령이 연설을 한다. 올해는 노무현 대통령이 일본에 대해 잘못된 역사의 미화이며 정당화라고 경고를 하면서 성의를 다할 것을 요구했다. 작년에는 기념식전에 결석을 하고 골프장에 있던 국무총리가 비판을 받아 사임하는 사건도 있었다.

한편, 중국에서는 재작년 봄의 일이 기억에 새롭다. 상하이()등지에서 반일 데모가 연이어 일어나, 5월 4일은 특히 일중 당국자가 긴장하였다고 한다. 데모에 사용된 저제일화()(일본 제품 보이콧)라는 단어는 5•4 운동의 슬로건이기도 했다.

일본의 이웃나라들에서는 아직도 그 날의 기억이 생생하다. 그런데 일본은 어떠한가. 먼 옛날의 잊혀져 가는 사건으로 생각하고 있지는 않을까. 그러나 동아시아에서 일어난 두 개의 대규모 민중 운동은 같은 해 2월 8일, 도쿄에서 일어난 한 사건이 계기가 되었다.

도쿄 스이도바시(). 큰 길에서 들어간 일각에 재일본한국 YMCA의 건물이 있다. 정면 현관 우측에 높이 2미터 정도 되는 흰 비석이 서 있다. 조선 독립선언 1919. 2.8. 기념비라 쓰여 있다. 이 날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YMCA역사 등으로 재현해 본다.

눈이 내리던 날이었다. 오후 2시, 강당은 약 600명의 조선인 유학생으로 가득 차 있었다. 경계하는 경찰관의 눈을 피하기 위해이 날은 학우회 총회라는 구실로 모였다. 개회와 함께 계획대로 독립 대회로 바뀌었다. 단상에 독립선언문이 붙여졌고 대표자가 읽어 내려가자 장내는 박수와 환성으로 들끓었다. 제국주의 일본에 반기를 든 순간이었다.

당시 간다()에 있던 건물은 관동 대지진 때 불타버리고, 많은 관계 자료도 지진 재해로 없어졌다고 한다. 이후, 지금의 장소로 옮겨졌다. 기념비 외에 다른 것은이라고 부관장 김홍명() 씨에게 물었더니 9층으로 안내해 주었다. 낡은 금속제의 릴리프가 복도 벽에 걸려 있었다. 당시의 선언문을 찍은 것이었다. 기초자는 당시 와세다(稲)대학 학생으로, 문인으로서 이름을 남긴 이광수다. 3•1 독립 운동에서 읽은 문장에 비해, 꽤 전투적인 내용입니다.라고 김 씨는 말했다. 마지막 구절에 요구가 통하지 않으면, 언제까지라도 혈전을 한다라고 쓰여 있었다.

1910년 한일합방 이래로 조선 민족은 일본으로의 동화를 강요당하여 학교에서도 일본어를 중점적으로 배웠다. 민족의 존엄을 해치는 지배에 대해, 물밑에서는 독립 운동이 태동하였던 것이다. 예를 들어 상하이()에 망명한 독립 운동가 여운형은 당시, 신한청년당을 만들어 도쿄의 유학생을 비롯해 각지와의 네트워크 만들기에 바빴다.

1919년 1월, 조선 왕조의 황제였던 고종이 사망하자, 일본에 의한 독살설이 퍼져 대중의 분노에 박차를 가했다. 제1차 세계대전의 강화회의에서 발표한 민족 자결즉, 어느 민족도 타민족이 간섭해서는 안 된다,라는 생각도 뒷받침이 되었다.

3월 3일의 고종 장례식에 맞춰서 어떠한 형태로든 독립 운동을 일으키려는 모색이 조선에서 시작되었다. 그러한 가운데 들려 온 소식이 도쿄에서의 유학생 궐기 소식이었다. 유학생 중 한 명은 옷감에 적은 선언문을 모자 안에 숨기고 서울로 건너갔다. 그 문장은 3•1 독립선언문에 영향을 주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 밖에도 도쿄 집회에 참가한 유학생의 일부는 조선으로 돌아가 독립 운동의 준비를 진행했다.

노인들의 휴식 장소로 알려진 서울의 탑골공원(구 파고다공원)은 3•1 독립 운동의 발상지다. 문을 나서면, 바로 오른쪽에 독립선언문을 새긴 거대한 비석이 있다. 마지막 부분에 주도자인민족 대표라는 이름으로 33명의 이름들이 줄지어 있다. 그러나 실제로 민중들 앞에서 선언문을 읽은 것은 학생으로, 그들은 그 자리에 없었다. 가까운 요리점에서 선언문을 읽자마자 경찰에 투항했다. 선언에 쓰인 비폭력을 표현했다.라는 등 몇 가지 설이 있다.

데모는 약 3개월 동안, 전 국토에서 1542회가 행해졌다. 인구의 약 1할에 해당하는 200만 명이 참가한 것으로 여겨진다. 당시는 집회, 결사의 자유도, 조선인이 자유롭게 의사를 전할 수 있는 매체도 없었다. 한편,민족 대표가 체포를 당한 와중에 독립 운동은 어떻게 전국으로 퍼졌을까. 민족 운동사가 전공인 신용하(慎) 이화여자대학 석좌 교수에게 물어 봤다.

종교 단체와 학교 조직이 움직였습니다. 이 두 단체만은 총독부에 사전 연락 없이도 집회를 할 수 있었습니다. 천도교, 크리스트교, 불교도, 학교 교원들이 사전에 선언문과 태극기를 각지에 배부했다. 선언문에 있는 민족 대표는 모두 종교 지도자였다. 한편, 많은 민중을 모을 수 있도록 지방 도시에서는 사람들이 모이는 장날에 운동을 했습니다.라고 말한다.

미리 의도된 네트워크와 우발적인 사람들의 연결이 상승효과를 낳은 것이었다. 해외의 민족 운동에의 영향도 컸습니다. 특히, 중국의 5•4 운동이 일어나는 외부적인 요인이 되었습니다.

중국에 튄 불똥 / 궐기를 재촉하는 교수들

그 말대로 3•1 운동은 중국에 비화했다.

우선, 일본의 탄압을 피한 멤버들이 상하이()에서, 현 한국 정부의 근간이 되는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수립하여, 상하이()는 독립 운동의 거점의 하나가 된다. 여운형과 2•8 선언을 기초한 이광수도 참가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국 지식인들에게 자극이 되었다.

각지의 노동자와 농민들이 참가하여 전국적인 애국 운동으로 발전하게 된 5•4 운동은 먼저 베이징 대학(学)에서 시작되었다.

조선의 3•1 운동을 주목하고 있었던 이들은 공산당의 창설자라 불리는 교수 리다자오(), 천두시오(), 학생회의 중심인물이었던 후스니엔() 등이다. 자신이 편집하는 잡지에서 적극적으로 3•1 운동을 다루었다. 자신들의 미디어를 갖지 못했던 조선과는 달리, 중국에서는 잡지가 큰 역할을 해냈다. 베이징 대학(学)에서는 교원과 학생들이 여러 잡지들을 발행하고 있었다. 천()은 조선인을 보아라.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느냐.라고 호소했다.

베이징() 중심부에 54대거리()라 불리는 큰 길이 있다. 옛 베이징 대학(学)의 건물홍루(楼)에는 베이징() 신문화운동 기념관이 있어 5•4 운동의 자료를 전시하고 있다. 그러나 3•1 운동과 관련된 전시는 찾아 볼 수 없었다.

베이징 대학(学)의 쑹청여우() 교수(동북 아시아사 연구)는 대학 역사관에도 없습니다. 역사가 넓은 시점에서 파악되지 않고 있습니다. 5•4 운동을 중국사의 관점만으로 보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라고 솔직히 말했다. 3•1운동과 5•4운동은 틀림없이 사상적인 연관이 있습니다. 공통의 적은 일본이었지만, 단순한 반일이 아닙니다. 민중에 의한 반제국주의 애국, 민주 운동으로 파악해야 할 것입니다.

당시의 일본은 어떠했는가.

일본에서는 쌀 소동, 보통선거 운동도

일본도 민중 운동의 계절을 맞이하고 있었다. 3•1운동과 5•4운동이 일어나기 전 해 쌀값 상승을 계기로 도야마현(県)의 여성들이 항의데모를 한 이른바쌀 소동이 발생했다. 이는 전국으로 번져 탄광 등지에서는 폭동으로 커졌다. 이로 인해, 초대 조선 총독이기도 한 데라우치 마사타케(内)의 내각이 사직하게 된다. 또한 보통선거 운동도 활발해졌다. 다이쇼() 데모크라시라고 뒷날 불렸던 시대였다.

안에서는 데모크라시, 밖에는 제국주의. 이것이 당시 일본의 모습이었다.

그러한 일본 안에서, 3•1운동과 5•4 운동에 대해 이해를 표한 지식인도 있었다. 그 대표 격이, 다이쇼() 데모크라시의 아버지로 불리는 요시노 사쿠조()다. 도쿄 대학() 교수였던 요시노()는 크리스트교도로, 학교 내 YMCA의 이사장이기도 했다. 그는 중국인과 조선인 유학생들과의 접촉이 있었고, 그 중에는 학비를 보태주었던 학생도 있었다.

3•1 독립 운동 직후에는 일본 국민의 어느 부분에서도 자기반성이 없다.

어느 정도 자신들에 대한 반대 운동이 일어났을 때에는 이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첫 과제는 자기반성이 아니면 안 된다(중앙공론()). 5•4 운동에 대해서는 일본을 배척하는 것은 실은 자신들을 침략한 일본을 배척하는 것이다. 오늘날 일본은 침략의 일본과 평화의 일본 두 개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동방 시론())라고 호소하고 있다.

5•4 운동의 지도자였던 리다자오()는 요시노()가 중국 톈진()의 북양 법정() 전문학교의 교단에서 가르칠 때의 제자다. 서로 편집에 관계한 잡지를 주고받는 등 지속적인 교류가 있었다. 5•4 운동의 이듬해에는 베이징 대학(学)의 교수이기도 한 리()를 통해, 베이징 대학(学)의 학생단을 일본에 초대했다. 3•1 운동의 지도자인 여운형과도 도쿄에서 의견 교환을 하고 존경할 인물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도쿄 외국어대학(国学)의 요네타니 마사후미() 준 교수는 최근 몇 년 동안, 근현대사에서의 동아시아와 일본의 관계성을 논해 왔다. 학생은 일본인만이 아니라 아시아에서 온 유학생도 있다. 제각기 자신의 나라의 입장에서 밖에 역사를 배우지 않았기 때문에, 연관 관계와 관련시켜 보면 역사가 달리 보인다는 말들을 매년 듣습니다. 요시노()에 대해서도 다이쇼() 데모크라시 또는 보통선거 운동을 한 인물로 밖에 보지 않습니다. 3•1운동과 5•4에 관심을 가지면서, 조선인과 중국인이 서로 마주 보고 있었다는 사실에 일본인 학생들은 놀라고 있습니다.

도쿄()에서도, 서울에서도, 베이징()에서도, 역사는 기념비와 기념관에 깊이 새겨져 있었다. 그러나 지금, 일본인들은 3•1 운동이 제 발 밑인 도쿄()에서부터 시작된 것을 알고 있을까. 중국인은 5•4 운동에 영향을 준 조선인들의 존재를 알고 있을까. 한 나라의 역사라는 벽을 넘었을 때에, 사람과 사상을 잇는 네트워크의 존재등 더 중요한 일들이 보일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니시 마사유키 )

여운형(1886~1947)

조선의 독립 운동가. 중국을 거점으로 활동하였으며, 1919년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 정부 수립에 참가했다. 일본의 패전 후, 조선 인민 공화국건국을 주도하지만 1947년에 암살되었다. 한국에서는 오랫동안 좌파라는 낙인이 찍혀 왔으나, 2005년 노무현 정부의 역사 재검토 정책에 의해 서훈되는 등, 근년 재평가되고 있다.

리 다이쇼()(1889~1927)

중국 공산당 창설 멤버 중의 한 명. 와세다 대학(稲学)에서 공부했다. 신문화 운동을 지도하고, 잡지 신 청년 매주 평론을 편집했다. 북경 대학(学) 도서관 주임 당시, 보조원으로 마오쩌둥(沢)이 있었다. 1927년, 공산주의자 색출을 진행시키던 군벌 측에 의해 교수형에 처해졌다. 사후 80년이 되는 올해, 북경의 옛 저택이 기념관으로 일반에게 개방되었다.

요시노 사쿠조() (1878~1933)

미야기현(県) 후루카와초(()•현 오사키시()) 출신. 도쿄 제국대학을 졸업한 후, 위안 스카이() 장남의 가정교사로서 중국 톈진()에 부임했다. 유럽에서 유학을 하고, 도쿄대학() 교수 재직 당시 민본주의를 제창하여, 다이쇼() 데모크라시의 기수로 자리 잡는다. 노년에는 메이지 문화 연구에 힘썼다.

5•4 운동

1914년 7월, 유럽에서 제1차 세계대전이 발생하자, 영국의 동맹국 일본은 중국에 진출하고 있던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였다. 중국의 산동 반도()의 근거지 청도(青)를 공략했다. 일본은 이를 기회로 1915년 1월, 산동()에서의 독일 이권 양도와 남 만주(満)로의 권익 확대 등, 21개조의 요구를 들이대어 위안 스카이() 정부를 압박하고 요구를 관철시켰다. 1919년 1월 파리 강화회의에서, 중국은 산동()의 반환 요구와 21개조의 요구 조건 철폐를 상정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베이징 대학(学)을 중심으로 한 대학생 등, 약 3천명이 5월 4일 천안문 광장에서 항의 집회를 연 후, 데모를 일으켰다. 21개조 요구의 교섭을 담당했던 친일파 관료의 자택에 불을 지르는 등, 학생 30여명이 체포되었다. 이에 항의하여 더 큰 대규모 데모가 일어났으며, 상하이(), 하이난(), 톈진() 등에서는 일본 상품을 배척하고, 노동자들이 스트라이크를 일으키는 등, 전국 규모의 애국 운동으로 발전하였다. 그 결과, 정부는 친일파 관료 3명을 파면시키고, 강화회의에 출석한 대표단에게 조약에 조인을 거부하도록 하였다. 반일, 항일뿐만이 아니라, 군벌 지배 등 봉건주의에 대한 반대와 사상 해방운동 등 폭넓은 요소를 가진 운동으로 발전했다.

국경을 초월한 청년 아Q(Q)

원래부터 지상에 길이란 없다. 걷는 사람이 많아지면 곧 그것이 길이 된다. 이렇게 쓴 고고한 작가는 동아시아에서 사람들의 지침이 되었다.

루쉰() (1881~1936)

중국 근대문학을 연 작가, 사상가이다. 본명은 저우수런(). 대표적인 소설에 광인 일기() 고향아Q정전(Q伝)등이 있고 시와 산문, 사회 비평도 많다. 고골 리야노프스키(Nikolai Vasil'evich Gogol') 등 해외 작가의 번역가로도 알려졌다. 저장성() 사오싱()에서 태어났다. 또한, 문학자로서 고명한 저우쭤런()은 친 동생이다. 두 사람 다 일본과 관계가 깊다.

1902년부터 1909년까지 유학생으로 일본에 체재하면서 근대화를 몸소 눈으로 보았다. 나쓰메 소세키()의 옛 거처에 산 적도 있다. 그 간, 1904년 9월부터 1906년 3월까지는 센다이() 의학 전문학교(현 도호쿠대학(学) 의학부)에서 공부했다. 베이징()대학 등에서 교단에 섰다. 1930년에는 좌익 작가 연맹에 참가했다. 죽기 전 9년 동안을 보낸 상하이()에서는 우치야마 서점(内)의 우치야마 간조(内)와 교류가 깊었다.

봉건사회에의 안주를 비판

이름은 알고 있다. 아Q정전 고향이라는 제목도 기억에 있다. 양자를 선으로 연결하는 테스트라면 완벽하다. 하지만, 어떤 인물이 나오며, 내용은 어떻다는 수준의 얘기라면 자신이 없어진다.

루쉰()에 대해서, 현재 일본에서는 대부분 이 수준이 아닐까. 중학교 교과서에서 경의를 표한 후, 멀어진다문호란 대개가 그러하지만, 이름만 들어도 고개를 끄덕이는 지명도와, 어딘가 알 것 같으면서도 모르는 복잡한 느낌이 루쉰()에게는 있다.

일찍이 루쉰() 연구로 유명한 다케우치 요시미(内)는 작품 이해가 어려운 이유를 단적으로 두가지를 들고 있다. 하나는, 중국 사회의 과도기를 살아 온 루쉰()이 안고 있는 내적 모순이라는 본질적인 어려움이다. 또 하나는, 중국 근대사에 대한 일본인의 이해 부족이라고 말한다. 반세기 전의 지적이지만, 지금도 해당되는 지적일 것이다.

중국과 한국의 연구자에게 물어 보아도, 젊은 세대들에게 루쉰()이 경원시되는 사정은 비슷한 것 같다. 중국의 교육계에서는 현재, 교과서의 루쉰()에 대한 취급을 둘러싸고 논의가 일고 있다. 같은 루쉰()의 작품이라 하더라도 비교적 쉬운 작품으로 바꾸던가, 차라리 다른 작가의 작품을 채택하던가. 마오쩌둥(沢)이 성인이라고 절찬을 아끼지 않은 것을 보면 뜻밖이라는 생각도 들지만, 루쉰()의 고국에서도 세월은 흘렀다.

루쉰()이 살았던 시기는 바로 이번 제4장에서 다룬 시대다. 유학생으로서 20대의 7여 년을 메이지 시대의 일본에서 보낸 루쉰()은, 중국에서 5•4 운동이 일어난 1919년에는 38세였다. 그 전 해 잡지 신 청년(青)에 광인 일기()를 발표하여, 최초의 구어체 소설로 중국 근대문학의 막을 열었다.

천두슈(独)가 창간한신 청년(青) 은 민주와 과학을 내건 문학 혁명의 발신 원으로, 루쉰()은 거기에 론()이 아닌 구체적인 작품을 들고 나타났던 것이다.

청조가 무너진 후의 혼미한 상황이었고, 중국은 국민 국가로의 길을 모색하고 있었다. 광인 일기()의 등장은 그러한 국민 국가 형성을 향한 새로운 국어의 획득이라 할 것이다. 게다가 루쉰()은 이 소설에서, 유교로 엮어진 중국의 봉건사회를 준엄하게 비판하며, 이제는 눈을 뜰 때라고 재촉하고 있다. 이는 중대 사건으로, 그 후의 루쉰()은 많은 작품과 함께 생애를 끊임없는 논쟁--정치적 투쟁 속에서 보냈다. 노년 그들에게는 원망하도록 내버려 두어라. 나 자신도, 그 어느 누구 하나도 용서하지 않겠다.라고 쓰고 있다.

무책임해서, 무슨 일이 일어나도 자기에게 유리하게 해석하고 얼버무리는 아Q는, 루쉰()이 중국 사회를 철저히 분석하여 만든 인물이지만, 이 짧은 소설은 금세 국경을 넘어 대표작이 되었다. 아Q는 중국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도 비슷한 사정이었기 때문이다. 루쉰()은 아Q에 자신의 모습으로도 투영하여, 작품은 인간의 심오한 의문까지도 던지는 문학적 보편성을 가지고 각지로 퍼져 나갔다.

패전 후 일본에도 영향

후지이 쇼조() 도쿄 대학() 교수(54)는 루쉰()을 동아시아의 모던 클래식이라 부른다.

국민 국가 형성이 앞서 일어난 일본과 한 걸음 늦게 찾아온 동아시아 각국들을 잇는 중요한 위치에 있는 사람이었다. 문학자로서 할 수 있는 모델을 제시하였고, 싱가폴 등을 포함한 동아시아에서 아주 중요한 작가가 되었다

일본에서는 패전으로 너덜너덜 해진 국가를 재생하는 데에 루쉰()의 작품이 영향을 주었다. 전후의 일본 문학은 루쉰()을 빼고는 말할 수 없다고 말하는 후지이() 씨는, 당대의 인기 작가에게도 그 영향이 컸다는 것을 최근 저서인 무라카미 하루키() 속의 중국에서 상세히 기술하고 있다.

루쉰()으로부터 보다 직접적으로 사회적 영향을 받았던 것은 한국일 것이다. 일본의 식민지 지배 하에서 사람들은 루쉰()을 읽고, 당시 일본을 향한 저항 정신을 배양하였다. 아Q를 통해 자신을 바라봤으리라는 것은 쉽게 상상이 간다. 게다가, 대부분이 선택의 여지없이 일본어 번역책을 읽을 수 밖에 없었다.

1970년대부터 80년대에 걸쳐 한국에서 일어난 민주화 운동에도 루쉰()은 큰 영향을 주었다. 루쉰()은 체제에 비판적인 지식인의 아이콘이었다.라고 서울 대학의 임명신() 전임강사(42)는 말한다. 민주화 운동 또한, 루쉰()에게 고무되었던 것이었다.

민주화 운동을 한 문예 평론가로 저명한 임헌영() 씨(66)는 옥중에서도 루쉰()의 책이 버팀목이 되었다라고 회상한다. 학생들에게 문학론이나 창작에 대해 강의할 때는 지금도 본보기로 삼는 것은 루쉰()이다. 한국 외국어대의 박재우 교수(53)도 민주화 운동으로 투옥된 경험이 있는데 지식인이 해야 할 역할을 루쉰()으로부터 배웠다고 한다. 루쉰() 연구가가 되어, 수업에서도 다루고 있다.

물론, 루쉰()은 격렬한 투쟁의 양식으로서만 읽혀져 온 것은 아니다. 그것만으로는 동아시아의 모던 클래식이 될 수 없다. 임명신 씨는 이렇게 말한다.

루쉰()의 인생과 작품은 동아시아의 모순과 고뇌, 그리고 꿈의 총체입니다그 총체의 바닥에 흐르는 조용한 선율이 허무라는 것에, 루쉰()의 더없는 매력이 있다고 임 씨는 말했다. 문학으로서 진가가 있기 때문에, 루쉰()은 앞으로도 동아시아에서, 또는 세계에서 읽혀져 갈 것이다.

(후쿠다 히로키 )

후지노() 선생님 - 중국에서 지명도 높은 은사

고이즈미 준이치로(郎), 나카타 히데토시(寿), 하마자키() 아유미와 함께 당당히 9위에 오른 후지노() 선생님. 2003년, 어느 설문 조사에서 중국의 중학생 약 470명이 대답한 알고 있는 일본의 인물이다.

후지노() 선생님은 루쉰()이 쓴 작품의 제목으로, 센다이() 의학 전문학교의 은사였던 후지노 겐쿠로(厳郎) 교수와의 추억이 담겨져 있다. 후지노()는 해부학 교수로 루쉰()을 친절하게 지도했다. 베이징()루쉰() 박물관에는 후지노()가 석별이라고 뒤에 써서 루쉰()에게 준 자신의 사진과 함께, 빨강 펜으로 후지노()가 자세히 보충한 루쉰()의 노트가 전시되어 있다. 박물관 마당에는 최근 후지노()의 흉상이 세워져 9월 25일에 제막식이 있었다.

루쉰()에 의해서 중국에 널리 알려지게 된 후지노() 선생님이지만, 이 작품에서는 동시에, 의사를 지망하던 루쉰()이 문학으로 전환하게 된 계기라는 무거운 주제를 담고 있다.환등 사건(灯)이다. 센다이() 의전 수업에서, 남은 시간에 보게 된 러일 전쟁 때의 슬라이드에서 루쉰()은 스파이라고 일본군에게 처형당하는 중국인과 그것을 멍하니 보고만 있는 주위의 중국인들을 보았다.

후지노() 선생님에 앞서 나온, 제1 창작집 어함(吶)의 자서()에서도 루쉰()은 이 사건을 다루고 있다. 저 어리석고 나약한 국민들이 제 아무리 체격이 건강하고 장수한다한들, 겨우 무의미한 본보기의 재료와 그 구경꾼이 되는 정도가 아닌가라고 쓰고 있다. 먼저정신 개조야말로 선결해야 할 과제이며, 그러기 위해서는 문예가 제일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환등 사건은 실화 그 자체는 아니라고 생각되지만, 경애하는 일본인 교수의 추억과 민족적 굴욕을 함께 안고 루쉰()은 이윽고 중국으로 돌아간다.

[시리즈 지식인 20명에 듣는다] 8. 동아시아 근현대사의 10대 사건은?

일본의 패배가 격변시켜 버린 질서 - 정재정() 서울시립대 교수

한 나라 뿐만이 아니라, 동아시아 지역 전체에 끼친 영향을 생각해서 10대 사건을 골랐다. 지역의 국제 질서와 사회 구조, 국민의 의식을 바꾼 사건들을 중시하고, 그것이 세계에 미친 영향도 고려했다.

가장 중요한 사건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시아•태평양 전쟁이다. 이는 1937년 중일 전쟁부터 1945년 일본의 패배까지를 가리킨다.

대만과 한국을 식민지화 하고, 중국 동북부에 괴뢰 국가를 세운 일본은, 동아시아의 패권을 잡은 제국이었다. 그 일본이 중국을 침략하고, 미국과도 불꽃 튀기는 전면 전쟁을 했다. 그러나 일본이 패배한 결과, 그 때까지의 동아시아의 질서는 완전히 무너졌다. 지역의 운명은 미국과 중국에 맡겨졌으며, 한국의 해방도 이루어졌다.

청일 전쟁에서 일본이 거둔 승리는 동아시아의 중심 세력이었던 중국이 몰락하여 전근대 질서가 무너지는 계기가 되었다. 이로 인해 한반도에 대한제국이 생기고, 형식적으로는 한중일의 3국 관계가 만들어졌지만, 한반도와 만주를 둘러싼 러시아와 일본의 대립이 격렬해졌다.

러일 전쟁에서는 제국 일본이 승리하고 그 연장선상에서 대한제국이 무너지고 식민지화 되었다는 것이 중요하다. 일본은 한국을 대륙 진출의 병참기지로 삼았다. 또, 청일, 러일 전쟁의 승리를 내셔널리즘의 고양에 이용하여, 일본 국민에게 침략 전쟁에 대한 죄의식을 완전히 없애버리는 상황을 만들었다.

미소 대립이라는 신질서 아래에서 일어난 한반도의 한국 전쟁은, 동아시아에 냉전을 정착시켜, 세계적으로 긴장 상태를 강화하게 되었다. 중국은 미국과 대립하게 되었다.

동아시아의 근대화를 생각할 때, 메이지 유신은 아주 중요하다. 일본과는 대조적으로, 한국과 중국은 자력의 의한 근대화에 실패했다. 메이지 유신과 천황제 근대 국가의 성립은 동아시아의 다른 나라에게 자극을 주었지만, 일본의 침략에 대한 근린 여러 나라의 저항이라는 기본적인 관계도 이 때부터 생겨난 것이다.

일본의 경제 부흥은 대만과 한국의 경제발전으로 이어졌다. 오늘날의 동아시아는 세계 경제를 리드할 정도로 힘을 가지고 있다. 경제 발전은 또한 동아시아의 민주주의와 문화 발전의 토대도 되었다.

일본이 패전한 후, 중국 대륙에서의 결전에서 공산당이 승리를 하여, 국민당이 대만으로 쫓겨난 사건은 또 한 번 동아시아의 국제 질서를 격변시킨다.

중국은 1980년대 이후, 사회주의 경제 하에서 근대화 정책을 펴 왔다. 그를 통해 세계의 공장으로, 시장으로서 발전한 것이다. 이것은 한국, 일본과도 연계를 통해 동아시아의 경제적 분업 체제를 만들어냈다. 이러한 중국의 경제 개혁은 앞으로도 동아시아의 질서를 바꿀 가능성이 있다.

중국과는 대조적으로, 조선 민주주의 인민공화국(북한)의 경제는 파탄하여 궁지에 빠졌다. 북한은 탈출의 한 방편으로 핵무기 개발에 손을 대어 보았지만, 국제 사회의 비판을 받았다. 핵의 위협은 앞으로도 동아시아의 국제 관계에 영향을 줄 것이다.

김일성을 중심으로 하는 유일 체제, 주체 사상이 조선 민주주의 인민공화국에서 성립되고, 중국에서 문화대혁명이 진행된 것은 1950~70년대이다. 이 두 국가는 동서냉전을 격화시켜, 체제 간의 경쟁을 가속시킨 점에서 세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인터뷰: 요시자와 다쓰히코(沢))

*주 :청일 전쟁한반도러일 전쟁남북 전쟁은, 일본에서는 일청 전쟁조선반도일러 전쟁조선 전쟁으로 부릅니다만, 모두 인터뷰대로 기록했습니다.

약력

정재정. 1951 년 생. 전공은 근대 한일 관계사이다. 한일 역사 공동 연구와 민간 교류의 중심적 존재다. 저서에는 일제 침략과 한국 철도등이 있다.

10 대 사건

(1) 아시아•태평양전쟁과 일본 제국의 붕괴

(2) 청일 전쟁에서의 일본 제국의 승리와 중화 제국의 몰락

(3) 러일 전쟁에서의 일본 제국의 승리와 대한 제국의 식민지화

(4) 대한민국•조선 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의 성립과 한국 전쟁

(5) 메이지 유신•천황제 근대 국가의 수립과 근린 제국에의 임펙트

(6) 패전 후 일본의 경제 부흥과 한국•대만의 경제 발전

(7) 중화 인민공화국의 수립과 중화 민국의 대만 이동

(8) 중화 인민공화국의 개혁•개방과 경제 발전

(9) 조선 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의 경제 파탄과 핵개발

(10) 조선 민주주의 인민공화국에서의 수령 유일 체제 성립과 중화 인민 공화국에서의 문화대혁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