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5년 을미사변 직후 신변에 위협을 느낀 고종이 러시아에 궁궐 수비병을 지원해 달라고 요청했다는 내용을 담은 러시아 자료가 처음으로 확인됐다.
김영수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은 31일 서울대에서 열리는 전국역사학대회에서 발표할 예정인 논문 주한 러시아 공사 베베르 자료로 본 한러 관계와 을미사변에서 1903년 카를 베베르 러시아 특명전권공사가 본국에 보고한 1898년 전후 한국에 대한 보고서를 분석했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1895년 11월 19일 주한 러시아 공사였던 베베르는 러시아에 전문을 보내 고종이 궁궐 수비병을 지원해 달라고 요청했다는 사실을 알린다. 고종은 베베르에게 지원 요청이 담긴 친필 서신을 내렸다.
당시는 일본이 명성황후를 살해하고 친일 내각을 구성한 직후로 고종도 신변을 위협받던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김 연구위원에 따르면 베베르는 조선주재 외교단 회의가 열린 1895년 10월 25일 고무라 일본공사의 면전에서 내가 병력 50명을 이끌고 군부대신 조희연을 체포한 뒤 (일본군의 뒷받침을 받는) 훈련대의 무장을 해체하겠다고 협박했다. 베베르는 이틀 뒤인 27일 러시아 외무부에서 귀관의 판단 아래 음모자들의 위협으로부터 고종을 보호하기 위한 모든 조치를 승인한다는 허가를 받았다.
이 자료에 따르면 고종의 처지는 말이 아니었다. 베베르 공사의 1903년 보고서는 아관파천 당시 일본 보초가 궁궐에서도 국왕(고종)을 포로처럼 감시했다고 전한다. 김 연구위원은 고종의 궁궐 수비병 지원 요청에 대해 고종이 신변 불안을 러시아의 군사 지원을 통해 타개하려 했던 것이라고 말했다. 러시아가 바로 궁궐 수비병을 파견하지는 않았지만 이는 이듬해 2월 고종이 정동의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는 아관파천으로 이어진다.
베베르 보고서에는 아관파천 초기 민심을 알 수 있는 부분도 나온다. 보고서는 아관파천 아침 대격변이 일어났다. 수많은 고관대작과 수천 명의 한국인이 러시아 공사관 구역 안으로 밀려들어왔다고 전했다. 또 러시아 공사관이 있던 정동 길은 군주에게 축하를 드리고자 찾아온 환호하는 백성, 군대, 경찰로 가득 찼다. 이것은 백성의 축제였다고 묘사했다. 당황한 일본은 성난 군중으로부터 일본인들을 방어하기 위해 주둔군을 서울 남쪽으로 물렸다. 을미의병이 일어나던 당시 민중들의 반일 감정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