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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살아있다]제10장 중국의 개혁과 개방()

[역사는 살아있다]제10장 중국의 개혁과 개방()

Posted August. 07, 2008 19:06   

덩샤오핑()이 기도한 사상 유례없는 실험

아편 전쟁 이후의 동아시아 역사에 대해 살펴 온, 본 시리즈의 마지막 장이다. (상)에서는 현저하게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중국의 개혁과 개방에 대해서, ()에서는 한국과 대만의 민주화를 테마로 이 지역이 걸어 온 발자취를 더듬어보고 장래에 대해 생각해 보기로 한다.

늦은 밤, 베이징() 숙소에서 잠을 이루지 못해 창문을 열고 담배에 불을 붙였다. 아무데서나 흡연을 할 수 없는 일본에 비해, 아직 흡연을 할 수 있는 방이 있다는 사실이 나에게는 고맙기만 했다. 하지만 이 나라도 머지않아 달라질 것이다.

끊이지 않는 자동차의 클락션 소리와 어디에선가 흘러나오는 중국 경극풍의 음악이 섞여 3월을 맞아 갑자기 따뜻해진 베이징()의 밤은 떠들썩했다. 올림픽을 앞 둔 거리는 부산하고 공사장의 망치 소리도 섞여서 들려왔다.

거대한 몸체를 움직이며 맹렬히 전진하는 중국. 5년 연속 실질 경제 성장률은 두 자리 수를 기록하고 있고 무역 총액은 미국과 독일에 이어 세계 3위이다. 외화 준비고는 일본을 넘어서 세계 1위로 부상했다. 앞으로 얼마나 성장을 계속할 것인지, 아니면 조만간에 파탄 나고 말 것인지, 중국의 발전을 둘러싸고 세계는 떠들썩하다.

13억이라는 인구—정확히 세어보면 14억일지도 모른다--가 만드는 국가이다. 13억이란 인구만으로도 무리한 실험인데 게다가 공산당 독재체제 하의 시장 경제라는 유례없는 시도를 하고 있다면, 전 세계가 침을 삼키며 주목하는 것은 당연하다.

베이징()에 있는 칭화(清) 대학의 후안강() 교수(54)를 방문했다. 그는 중국의 경제와 정치, 사회를 종합적으로 분석하는 국정(国) 연구의 제 일 인자이다. 중국의 대두를 나타내는 세계은행의 숫자를 차례 차례로 들며 경제 성장의 기세와 같이 힘주어 말했다.

강국()과 부민(), 이 두 가지를 함께 달성하지 않으면 안 된다. 앞으로 넘버원은 중국뿐일 것이다

환경오염 방지와 정치 그리고 사회 안정 등, 후()교수는 더욱 더 발전하기 위한 과제들을 지적하는 일도 잊지 않았다. 하지만 무엇보다 내가 수긍한 것은 중국 정부의 정책 결정에도 관여하고 있는 후교수가 이 거대한 나라의 행방을 정확하게 예측하는 일은 어느 누구도 할 수 없다고 말한 것이었다.

1980년 중국에서 처음으로 경제 특구가 된 선전()을 15년 만에 다시 방문하였다. 고층 빌딩 군은 멀리서 보면 맨하탄 같기도 하고, 왕래하는 사람들의 옷차림도 도쿄()의 번화가와 차이가 없었다. 예전에 왔을 때에는 생긴 지 얼마 안 된 백화점에서 점원들이 무엇을 해야 할지도 몰라 딱딱하게 서있었지만, 지금은 완전히 백화점 직원다운 얼굴로 분주히 일하고 있었다.

작년 한해 선전시의 총생산(GDP)은 930억 달러였고, 수출입 총액은 2800억 달러로 항구의 컨테이너 물량은 세계 4위였다고 한다. 이렇게 숫자를 열거해 준 사람은 선전()시 사회과학원 원장인 로친() 씨(52)였다. 인구 860만 명에 전출입을 포함하면 1200만 명이 된다고 하니, 이 점에서도 도쿄와 같은 수준이다.

선전시에는 우한()의 우창()역으로부터 4 인용 침대 야간열차가 다니는데, 훌륭한 우창역 건물에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일본 엔으로 약 170억 엔을 들인 확장 공사가 거의 끝날 무렵이었다. 마치 박물관처럼 크고 호화로웠다. 구내 통로의 폭이 20미터나 되었다. 건물뿐만이 아니라, 부 역장인 양타오() 씨(35)에 의하면 근본적인 이념을 크게 바꾸었다고 한다. 무엇인가 했더니, 표를 사는 것과 갈아타는 편들을 이용객 본위로 바꾸어, 종래의관리하는 역에서 서비스하는 역로 바뀌었다고 한다.

우창을 출발하여 흔들리는 열차에 몸을 맡겨 도착한 선전에는 연꽃 산이라 불리는 아름다운 공원이 있다. 작은 언덕 위에는 멋진 동상이 고층 빌딩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의 이르는 중국의 개혁과 개방 노선을 시작한 덩샤오핑()이다.

사람들은 이곳 선전을 덩샤오핑이 만든 마을이라고 부른다. 다른 공원에는 거대한 덩샤오핑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고, 백 년 동안 흔들림 없이 당의 기본 노선을 굳건히 지킨다(党揺)라고 쓰여 있었다. 개혁과 개방이 백년대계라는 말이지만, 덩샤오핑이 이 노선을 걷기 시작한 것은 1978년,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30년 전의 일이었다.

그 당시 이 노선의 상징이 된 중대 사업이 있었다.

일본과 중국이 협력해 설립한 제철소 지금은 세계 톱 수준

길가의 환호에 답하며 많은 성화 봉송 주자들이 손에 성화를 들고 중국의 거리를 달린다. 거대한 용이 춤을 펼치고, 온통 주위는 축제 분위기이다. 회장에 도착한 봉송 주자들이 성화대로 올라가 엄숙하게 불을 옮긴다--.

이 광경은 베이징() 올림픽의 예행연습이 아니다. 1985년 9월, 상하이() 바오산() 제철소 제 1 용광로의 점화식 모습이다. 나는 당시의 기록 비디오에서 이 광경을 보았다. 작가 야마자키 도요코() 의 대지의 아이로 널리 알려진 바오산 제철소는 신 중국이 탄생한 이래, 최대의 국가 프로젝트로 1978년에 착수되었다. 중국의 모델이 되어 지도를 담당한 일본의 제철회사 신니테쓰(鉄)와의 긴 세월에 걸친 공동 작업에 의해서 탄생한 바오산 제철소는 전후 일본과 중국의 협력의 상징이 되었다.

제1 용광로 점화식 출석자 중에 바오산 제철소 프로젝트의 중국 측 책임자의 한 명이었던 호앙칭화(黄発) 씨(81)가 있었다. 상하이에서 호앙(黄) 씨는 그 날은 기분이 좋아서 평상시에는 안 마시는 술까지 마셔 취해버렸다고 그리운 듯이 말했다. 호앙(黄) 씨는 바오산 제철소를 세우면서 신니테쓰 측과 이 기계가 필요하다, 이건 된다, 아니 그건 안 된다라며 서로 격렬하게 논쟁한 당사자였다.

중국 측에서는 최신예 신니테쓰의 기미쓰() 제철소와 꼭 같은 제철소를 만들 것이라며 양보하지 않았다. 기술 지도로 낮선 이국땅에 파견된 신니테쓰의 사원들은 온갖 고생을 하였다. 현재, 신니테쓰의 엔지니어링 상무 집행 임원인 다카하시 마코토() 씨(58)는 중국 기술자들의 넘치는 의욕과 그로 인한 집요한 질문 세례를 받았던 나날들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당시 20대로 젊었음에도 설계 연락원으로 뽑혀 상하이로 건너갔다.

이 나사는 왜 구부러져 있는지, 날카로운 이유는 무엇인지. 중국에서 다카하시() 씨는 수없는 질문 공세를 당했다. 잘못하기라도 한 날에는 가차 없이 비판당했다. 이 쪽 설명을 듣고 바로 예스라고 대답하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었다고 한다. 전쟁의 기억이 지금보다도 더 선명했던 때였다. 상하이에 모인 중국인 기술자의 입장에서 보면 일본에게 우리가 업신여김을 당할 수 없다는 자존심과 기술을 배우고자 하는 순수한 열정이 섞여 있었던 것 같다.

한편, 중국 측도 일본으로 사람을 보내 신니테쓰에서 연수를 시키고 있었다. 서로 언쟁을 하면서도--아니 그러한 언쟁이 있었기에—바오산 제철소 건설이라는 하나의 목표를 향한 공동 작업은 서로의 이해를 깊고 돈독히 해 나갔다.

현장의 고투가 계속되는 가운데에도 바오산 제철소 건설은 한두 번이 아니라 몇 번이나 중지되는 위기 상황에 처했다. 중국의 자금 부족과 공산당 내의 격렬한 권력 투쟁과 크게 관련돼, 계획은 건설 도중에 흔들리고 또 흔들렸다.

중국 측의 총지휘를 맡았던 천진화() 씨(79)를 베이징에서 만났다. 이렇게 여기서 끝나는구나라고 생각했던 시기도 있었다고 한다. 신경성으로 인해 위가 쓰린 나날들이 이어졌다. 가장 큰 버팀목은 덩샤오핑이었다며 천() 씨는 한 가지 에피소드를 말해 주었다.

건설이 한창이었을 때, 일본에서 도착한 지정()공사 기계에 흠집이 있다며 중국 측에서 일본이 중고품을 강매했다며 큰 소란이 되었던 적이 있었다. 이에 덩샤오핑이 무슨 일인가라고 물었다. 천() 씨가 조사를 해 보았더니, 실은 중국 측의 검사 과정에서 생긴 흠이었다고 설명을 하자, 그렇다면 모두에게 그 사실을 잘 알아듣도록 이야기를 하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천씨는 일관된 방침에서부터, 큰일에서 작은 것에 이르기까지 구체적으로 지시를 하는 덩샤오핑이 없었더라면, 바오산 제철소 건설은 있을 수 없었다라고 회고하였다. 그 후 국가 계획 위원회 주임까지 역임한 천씨는 개혁과 개방 노선을 이끈 사람으로 지금은 중국 기업연합회 명예회장으로서 중요한 인물이다.

천씨 또한 현장 사람들처럼 바오산 제철소 건설을 통해서 일본인을 잘 알게 되었다. 신니테쓰 회장으로서 일본 측 요인이었던 이나야마 요시히로(稲寛) 씨에게는 지금까지도 존경을 표하고 있다. 건설 당시의 일본인 기술자들의 일하던 태도를 높이 평가하여, 루쉰()의 수필후지노() 선생님을 자주 떠올렸다고 했다고 말했다.

아무 것도 없던 허허벌판에 세워진 바오산 제철소는 거대 기업 바오강 집단()로 성장하였다. 2004년에는 미국 경제 잡지인 포츈(Fortune)에 세계의 500 기업 중 하나로 이름이 올랐다. 신니테쓰의 상무 집행 임원인 이리야마 유키() 씨(60)는 엔지니어 층이 두꺼울 뿐만 아니라, 설비와 효율성에서도 바오강 집단은 중국에서 대단하다. 이 정도면 분야에 따라서는 일본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철강을 만드는 기본적인 기술은 세계 최고 수준에 들어간다라고 말했다.

바오산 제철소가 견인차가 되어 중국의 철강업은 약진을 하였다. 1978년에는 세계 5위였던 조강 생산량이 1996년에는 톱 대열에 올랐다. 중국 내 수요 규모도 타국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일본의 철강업이 금세기에 다시 활력을 되찾은 원인이 중국 덕분이라고 한다면, 철강 자원의 쟁탈전이 벌어져 원료 가격이 상승하여 고심하는 원인도 중국 때문이다. 일본의 철강업계는 이 거대한 바오산 제철소의 몸 짓 하나에도 흔들리고 만다.

천 씨는 자신의 저서인 국사억술에서, 철강은 국가 발전의 기본이라는 말을 실천하고 있는 중국에 대해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중국은 기원전부터 강철을 만들어 그 기술로 세계를 리드하였지만, 후에는 뒤쳐지게 되어 근대적 제강 기술을 가진 열강에게 거듭 침략을 당했다라고. 일본에서는 일청 전쟁이라 부르고, 중국에서는 갑오 전쟁이라 말하는 그 시점에서부터의 역사를 생각해 보면, 좋은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바오산 제철소의 건설은 역시 귀중한 공동 작업이었음에 틀림이 없다.

호앙칭화 씨는 바오산 제철소를 일컬어 음수사원(飲)이라고 했다. 물을 마실 때에는 물이 솟아 나오는 근원을 생각한다는 말이다.

지방 순회 강화()가 계기 / 경제 개혁을 향해 달리다

선전, 우한, 상하이, 필자가 다루어 온 장소는 모두 덩샤오핑과 인연이 깊은 지역이다. 개혁과 개방 노선을 달리기 시작한 지 수십 년이 지난 1992년 초, 덩샤오핑이 이 지역들을 순회하면서 개혁 노선 추진을 주창했다. 우창역은 바로 이 남순강화()의 무대가 된 장소이다. 중국이 개혁과 개방을 향해 실제로 질주하기 시작한 것은 이 남순강화()로부터며 사회주의 시장 경제를 제창한 것은 바로 1992년의 일이었다.

등소평은 흰 고양이든 검은 고양이든 쥐를 잡는 놈이 좋은 고양이다라는흑묘백묘론()을 어록에 남겨 널리 알려졌지만, 남순강화()에서 그 다운 여러 가지 지론을 전개하여 평가를 받았다.

옳다고 판단하면 1, 2년 해 본다. 그래서 잘 되면 과감히 실행에 옮기고, 잘못이 있으면 시정하고, 아니면 그만둔다. 그만둘 때도 바로 그만두어도 좋고 상황을 봐 가면서 서서히 그만두어도 괜찮다. 또 여지를 조금 남겨 놓아도 괜찮다.

일본의 샐러리맨이 들으면 쓴 웃음을 지으며 수긍할 만한 얘기도 있다.

회의가 많다. 한 문장이 길고 이야기도 너무 길다. 게다가 내용이 중복되어 새로운 말은 적다. 부분적으로는 중복해서 강조할 필요도 있지만, 간결해야만 한다.

알려 지지 않은 자리에서 무엇을 어떻게 말했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이처럼 그의 발언은 단적이고 알기 쉬웠다. 많은 국민들에게서 지지를 받은 것도 당연하다. 그렇다면 한번 해 볼 까라며 중국은 돈벌이에 매진 한 것이었다. 일본 도요학원() 대학의 슈켄에이(栄) 교수의 해설을 들었다.

1980년대는 중국이라는 점보기가 이륙하기 위한 활주 단계에 있었다. 1992년에는 확실히 조종간을 올린 때였다. 소련과 동유럽에서의 계획 경제의 모순을 눈으로 보았고, 문화대혁명의 비참한 경험이 개혁과 개방의 길에 확신을 주었다

덩샤오핑의 수완은 높게 평가할 만하다고 슈() 교수는 말한다. 덩샤오핑은 무너져가는 소련과 동유럽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중국 내의 불평불만들이 정치 체제로 향하지 않도록 경제 개혁을 추진해 나갔다. 정치 체제로는 강경하게 공산당 독재를 고수하였고 1989년의 천안문 사건 때에는 탄압을 주저하지 않았으므로, 그를 무조건 좋게만 평가할 수 없다. 하지만, 덩샤오핑 없이 중국이 어떻게 통치되었을지 생각해 본

다면, 확실히 이렇다고 대답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본디부터 장사에 능숙한 중국인들이 한번 마음먹으면 지금 같은 상태는 금방이지만, 그로 인해 파생하는 문제 또한 심각하다. 도시 지역이야 말로 눈부시게 화려해 졌지만, 지방으로 가면 먹을 것이 제대로 없는 사람들이 억 단위로 살고 있다. 공무원의 부패 또한 엄청나다---2007년까지 5년 동안에 유죄 판결을 받은 악덕 공무원만도 11만 명이 넘는다—--중국 내에 쌓인 불만의 소리가 심상치 않다고, 최근 일 년 동안 중국에 갈 때마다 여기저기서 자주 얘기를 듣는다. 개혁과 개방 속에서 현 정치 체제의 모순은 언젠간 분출하고 말 것이라는 진단도 빈번히 나오고 있다.

중국으로서는 선행 모델이 없다. 중국은 문제가 생기면 어떤 식으로든 수정하고, 그렇게 조금씩 변화하면서, 구소련식도, 구미식도 아닌 방법을 찾을 수밖에 없다.

처음부터 지상에 길은 없었다라고 말한 것은 루쉰이었다. 그 루쉰이 생각지도 못했던 길을 중국은 나아가고 있다.

후쿠다 히로키()

키워드중국의 개혁과 개방

농업, 공업, 과학 기술, 국방의 네 개의 근대화를 향하여 덩샤오핑()의 주도로 시작된 국내 개혁 및 대외 개방 정책을 일컫는다. 1978년 12월에 열린 중국 공산당 제 11기 중앙위원회 제 3회 전체 회의에서 마오쩌둥() 시대로부터 이어져 온 노선의 역사적인 전환점을 맞이했다. 마오쩌둥의 서거와 장칭()부인 등 4인조가 체포된 2년 후의 일이었다. 대약진 정책이나 문화대혁명의 혼란으로 피폐해진 중국은 이후, 종래의 계획 경제를 벗어버리고 대담하게 시장 원리를 채용하게 되었다.

인민공사를 해체하여, 개별 농가에 자주적인 권한을 주는 생산 청부제로 바꾸어 국유 기업을 지키면서도 개인 경영을 인정하였다. 광둥성()의 선전() 등에 경제 특구를 만들어 적극적으로 외자 도입의 유치를 도모했다. 풍요로울 수 있는 조건을 가진 지역이 먼저 잘 살도록 하자라는 덩샤오핑 생각은 선부론()으로 알려져 있다. 1989년의 천안문 사건으로 중국은 정치와 경제 활력이 약해졌지만, 이를 지켜본 덩샤오핑은 1992년에 남순강화()에서 개혁과 개방으로의 대대적인 선포를 행하였다. 이후 중국은 사회주의 시장 경제를 내걸고 경이적인 경제 성장을 계속하고 있다. 그러나 한편, 연안지방과 내륙지방에서는 격차와 환경오염 등의 문제도 심각해지고 있다.

한국대만의 민주화 각국 교과서 비교

중국에서개혁과 개방노선이 시작되었으며, 1980년대 후반부터는 한국과 대만에서 민주화가 진행되었다. 이러한 주요 사건들에 대해 중학생들은 역사 교과서를 통해 어떻게 배우고 있는지 알아보기로 한다.

일본-각 국의 국내 문제로 파악하는 대신 기술이 없다

중학교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도쿄 서적()의 새로운 사회 역사에서는 중국의 개혁•개방과 한국, 대만의 민주화에 대한 기술이 전혀 없다. 다른 출판사의 교과서에서도 마찬가지이다.

10년 전에 도쿄 서적()에서 출판한 교과서에는 아주 짧은 서술이지만, 중국의 민주화에 대해 다음과 같이 싣고 있다.

아시아에서는 1970년대 말부터 경제 개혁에 착수한 중국에서 1989년 민주화를 요구하는 움직임이 일어났지만, 정부에 의해서 진압되었다(천안문 사건). 그 후에도 경제는 급성장을 거듭하고 있지만, 정치적인 민주화가 큰 과제가 되고 있다.

와타나베 노리오(辺) 사회 편집부장은 중학교에서 배우는 역사는 일본의 역사로 한정되어 있으므로 국제적인 사건들도 일본과의 관계를 토대로 채택하고 있다. 중국의 개혁•개방, 한국의 민주화 등은 각각의 국내 문제로 파악하고 있다라고 설명했다.

10년 전 교과서에 천안문 사건이 게재된 이유는 당시의 시사적인 문제로서, 그 후 일본에 영향이 있다고 판단하여 취급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일본에 있어서 중국의 중요성은 해마다 높아가고 있으므로 중학교 지리 교과서에서 중국에 관한 기술이 늘어나고 있다. 역사에서도 일중의 경제 관계에 대해서 다루게 되면 개혁•개방을 언급해야만 할 것이다라고 말한다.

덧붙여, 고등학교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야마카와() 출판사의상세 해설 세계사 B를 보면 문화대혁명 이후 덩샤오핑()이 부활하여 사회주의 시장 경제를 도입한 사실에 대해서, 천안문 사건과 그 후의 동향 등을 합하여 1페이지 정도로 기술하고 있다. 한국의 민주화에 대해서는 1992년 선거에서 김영삼이 32년 만에 군인 출신이 아닌 대통령이 되었으며, 차기 김대중도 민주 정치를 추진하였다고 8줄로 설명하고 있다. 대만에 대해서도 1987년 계엄령을 해제하였고, 88년부터 총통에 취임한 리덩후이()는 민주화 추진에 노력하였다.고 4줄 정도로 기술하고 있다.

오오쿠보 마키(真)

한국-쟁취한 민주화에 역점

한국사를 취급하는 국사교과서는 국정 교과서 한가지 밖에 없다. 교과서에서 한국의 민주화에 관한 내용은민주주의의 시련과 경제 개발, 민주화 운동과 통일을 위한 노력의 2장에서 다루어진다. 민주화 운동에 대해서는 1960년대부터 역사를 쫓아가며 본문 만해도 8페이지를 할애하고 있다.

우선, 이승만 대통령을 무너뜨린 1960년의 4•19 혁명에 대해서는 자유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학생과 시민들이 일으킨 것으로,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지키며 민주주의 이념을 실현하기 위한 것이었다라고 확고히 하고 있다. 많은 희생자를 낸 1980년의 광주 민주화 운동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군인들의 정권 장악 기도에 반대하고 자유 민주주의 헌정 체제의 회복을 요구하는 시민들의 시위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이 시위는 광주에서 절정을 이루어 5•18 민주화 운동으로 이어졌다.

더욱이 1987년에 일어난 전두환 정권 독재에 반대하여 대통령 직접 선거를 요구한 민주화 운동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시민은 군부 독재와 비리를 규탄하며 헌법 개정을 요구하였다. 이처럼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민들의 열망은 6월 민주 항쟁으로 승화되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고(1987), 이에 군부 세력이 굴복하여 마침내 6•29 민주화 선언이 이루어졌다.

국사 편찬 위원회의 김득중() 박사는 광주에서부터 시작된 1987년의 민주화운동의 흐름은 오늘날의 한국 민주 정치의 틀을 만들었다. 한국의 민주화는 외부로부터 배운 것이 아니라, 한국인 스스로가 쟁취한 것으로서 우리는 자부심을 갖는다. 이러한 점에 역점을 두고 가르치고 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대만의 민주화에 대해서는 세계사를 포함해 언급하지 않고 있다.

중국의 개혁•개방에 대해서는 세계사의 사회 2에서 취급한다. 금성 출판사의 교과서에서는 중국은1978년부터 개혁•개방 정책을 추진하여 경제가 빠르게 발전하였다는 2줄 정도이다. 그 외의 본문과 주에서 중국의 지도자로서 덩샤오핑()을 설명하고 있다.

사쿠라이 이즈미(桜)

중국-총 설계사•덩샤오핑()을 칭송 18 페이지

중국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인민 교육 출판사의중국 역사에서는 개혁•개방은 중국의 독자적인 사회주의의 건설이라는 단원에서 18페이지를 할애하여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정치 노선의 대전환을 대담하게 도모한 1978년 12월의 중국 공산당 제 11기 중앙위원회 제 3회 전체 회의(약칭 11기 3중전회)로 시작하여 1997년 덩샤오핑()의 이론이 중국 공산당의 규약으로서 지도적인 지위를 확립하기에 이르기까지를 설명하고 있다. 정말 이것이 중학생이 읽는 교과서일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딱딱한 표현으로 기술되어 있다.

예를 들어, 11기 3중전회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이 회의는 마오저둥()의 결정과 지시는 모두 옳다는양개범시(의 방침을 철저하게 부정하고, 새롭게 사상의 해방과 실사구시의 사상 노선을 확립하여, 계급 투쟁을 강령으로 삼는다는 슬로건을 폐지하고, 당과 국가의 임무를 경제 건설 중심으로 옮겨, 개혁•개방을 실행한다는 위대한 결정을 내리고, 회의에서는 실질적으로 덩샤오핑()을 핵심으로 하는 당 중앙의 지도 체제가 형성되었다.

양개범시란 마오쩌둥의 후계자인 화궈펑()의 방침으로, 마오쩌둥의 결정과 지시를 모두 지켜야만 한다라는 것이었다.

학습 지도 요령에 해당하는 중국의역사 과정 표준은 11기 3중전회는 중국 사회주의의 현대화를 건설하는 역사에 있어서 위대한 전환점이 된 것으로 인식한다, 덩샤오핑 이론이 개혁•개방과 사회주의 현대화 건설의 지도적 사상임을 인식한다라는 목표를 규정하고 있어 교과서에서는 이를 충실히 반영하고 있다.

아주 인상적인 것은 개혁•개방의 총 설계사, 덩샤오핑이라는 표제를 내걸고 그 이론과 실적에 대해 반복해서 소개하고 있다는 점이다. 사진도 4장이나 실려 있다.

그러나 1989년의 천안문 사건 등 중국 내의 민주화 운동에 대해서는 물론이거니와, 한국과 대만의 민주화에 대한 기술은 찾아 볼 수 없다.

사토 가즈오()

대만-정권 교대 정치의 상도와 평가

널리 사용되고 있는 남일서국()의국민 중학 사회에서는 중국사 부분에서 중국의 개혁과 개방에 대해 소개하고 있다. 약 3페이지에 걸친다. 중국 정부가 경제 개혁을 추진하는 한편, 천안문 사건 등 정치면에서는 억압을 강화한 것을 강조한다. 중공이란 중화 인민 공화국의 약칭이다.

중공은 경제에서는 개혁•개방을 실시했지만, 정치면에서는 억압을 강행하였다. 1989년 베이징()의 학생들이 천안문 광장에 모여, 정치 민주화를 요구하였지만, 6월 4일 중공 당국이 동원한 군대와 전차에 의한 진압으로 많은 민중과 학생들의 사상자를 내었다.

대만의 민주화에 대해서는 대만사 부분인 민주 정치의 발전이란 항목에서 3페이지를 할애하였다. 국민당 이외의 반체제 운동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1970년대 이후, 경제 발전과 교육 수준 향상에 힘입어 정치와 사회 개혁을 바라는 운동이 활기를 띄었다. 정부의 권위적인 지배 앞에 큰 도전이 되었다. 1979년에 일어난 메이리다오() 사건은 국제적인 관심을 불러 일으켰으며 민중의 정치 의식을 높였다. 1986년 민주 진보당이 성립되어, 당외 운동은 정당 간의 경쟁이라는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었다.

1996년의 총통 직접 선거와 2000년 국민당에서 민진당으로 정권 교체가 이루어진 흐름 등을 더듬어 가며, 대만은 정치의 상도를 걷고 있다고 높이 평가하고 있다. 한편, 한국의 민주화에 대해서는 세계사를 포함하여 언급하지 않았다.

남일서국()의 교과서 편집 지도 위원인 초우호이민(恵) 정치대학 역사학부 교수는 개혁•개방과 민주화에 대해서는 수업 시간 관계로 많이 가르치지는 못한다. 지리와 공민 시간에 취급을 하기도 하고, 역사를 포함해서 세 개 과목에서 종합하여 가르치고 있다라고 말했다.

공민에서는 민주 정치를 비교한다라는 과제를 만들어 실정이 있어도, 정부가 행정관의 법적 책임만을 추궁하는 나라와 위정자가 의회와 여론의 감시를 받아 스스로 사임하는 나라 중에 어느 쪽이 민주적인지를 생각하게 하고 있다.

다무라 히로쓰구 ()

시리즈 지식인 20명에게 듣는다 - 동아시아 근현대사의 10대 사건은?19

야마무로 신이치() 교토()대학 인문과학연구소 교수

출발점으로서 중요성 가지는 제1차 세계 대전

제일 먼저, 제1차 세계 대전을 들고 싶다. 여러 가지 사건들과 사상의 조류의 출발점이 여기에 있다. 중대성을 재인식할 필요가 있다.

윌슨 미대통령이 민족자결주의를 제창도 하였고, 조선에서는 3•1 운동이, 중국에서는 5•4 운동이 일어나는 등, 아시아에서의 식민지 해방 운동이 퍼져갔다.

동시에, 제1차 세계대전 중에 일어난 러시아 혁명으로 식민지 해방과 민족 독립 의 요구가 국제 공산주의 운동과 하나가 되었다. 한편으로는 대화(対) 21개조 요구와 시베리아 출병 등이 중국과 구미, 소련과의 알력을 증대시켜 태평양 전쟁을 향한 복선이 되었다.

더욱이 국제 연맹이 발족으로 국제 체계가 변하였고 전쟁의 위법화가 시작되었지만, 일본은 이 크나큰 변동에 대응하기는커녕, 오히려 총력전에 대한 위기감에서 군부의 대두를 촉진시켰다. 문화와 사상 면에서는 모던 걸과 모던 보이의 등장 등 적인 경향이 두드러지는 한편, 근대의 초극()론으로 이어지는 회의적인의 면도 나타났다.

다음은 아시아•태평양전쟁과 일본국 헌법 제정이다. 전쟁으로 아시아 각 지에서 일본인은 군인으로서 현지 사람들과 직면했다. 그런 일본인들은 예전과는 전혀 다른 체험을 했으리라 여겨지지만, 아시아에 대한 인식의 변혁으로는 직결되지 못했다.

하지만, 에도막부 말기 이래의 사상의 흐름 속에 전쟁 포기를 규정한 인류사적 의의를 가지는 헌법이 오랫동안 지지를 받아 온 것은, 군인으로서의 체험과 귀환을 포함한 식민지의 체험들, 그리고 비참했던 후방 체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일러 전쟁은 아시아 유색 인종의 자각과 대두를 이끌었다. 베트남, 중국, 인도 등지에서 유학생과 독립 운동가가 일본을 방문하여 아주화친회(亜会) 등 연대 조직이 태어났으며, 그것이 중국동맹회에 의한 신해() 혁명으로 이어졌다. 아프리카와 미국의 흑인 운동에도 영향을 주었다.

히로시마(広)•나가사키()의 원폭 투하는 중국의 충칭()과 도쿄() 등지에서 일어난 비전투 요원을 향한 무차별 학살과 더불어 인류에게 경종을 울렸다.

조선(한국) 전쟁은 미소 대립이라는 냉전 구조를 동아시아에 재생산하였고 일본의 재군비를 재촉하였다. 지금도 휴전 상태인 채로 21 세기까지 문제는 그대로 남아있다고 할 수 있다. 중화 인민 공화국의 성립도 냉전을 구조화하였고 , 중국과 대만의 관계 외에도 티벳과 위구르 문제 등의 어려운 문제를 오늘날까지 남기고 있다.

한국 병합은, 오늘날에도 그 합법성에 대해 논쟁이 끊이지 않는데서 알 수 있듯이, 한일 관계의 걸림돌로 화해의 걸림돌이 되고 있다. 또한, 일본의 조선반도(한반도) 지배권 유지를 위한 만주()와 몽고()를 생명선으로 하는 논의가 일어났다.

일청 전쟁과 일본으로의 대만 할양으로, 당시까지 동아시아의 지배구조였던 책봉과 조공 체제가 붕괴되었으며 국제법 체제로 전환하였다. 일본은 대만 영유를 기점으로 제국(나의 용어로는 국민 제국)으로 돌아섰으며 최종적으로는 대동아 공영권으로 발을 내딛었다.

만주국의 건국과 붕괴 후의 잔류와 억류 문제. 만주국 건국으로 일본의 식민지에 이슬람권이 포함되게 되었고, 일본의 대아시아주의에 의한 지배지 확장이 본격화되었다. 또한, 만주국은 일본의 기시 노부스케()와 한국의 박정희 등이 커가는 무대가 되었으며, 항일 운동이 중국과 북조선(북한)에서 김일성 정권의 정통성을 마련하는 근거가 되는 등, 전후 동아시아 체제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한편, 중국의 일본인 잔류와 일본인의 시베리아 억류 문제는 근본적인 해결이 일각을 다투는 상황이다.

마지막으로 중국의 개혁과 개방은 21 세기 아시아에 있어서 거대 차이나(대중화권)의 기점이 되었다. 오늘날의 국제 사회는 책봉과 조공 체제로 동아시아를 다스리던 구조와는 달라졌지만, 중화 세계에 어떻게 대처해 나갈 것인가라는 역사적 과제에 다시 직면해 있다.

인터뷰: 사토 가즈오()

약력

1951년생. 아시아에서의 법정 사상의 연쇄사를 연구. 저서로는 사상 과제로서의 아시아-기축•연쇄•투기등이 있다. 헌법 9조 사상의 수맥으로 시바 료타로(郎)상을 수상했다.

리스트

제 1차 세계대전

아시아 태평양 전쟁과 일본국 헌법 제정

일러전쟁

히로시마(広)•나가사키()로의 원폭 투하

조선 전쟁(한국 전쟁(

중화 인민 공화국의 성립

한국 병합

일청전쟁과 일본으로의 대만 할양

만주국 건국과 붕괴 후의 중국잔류와 시베리아 억류 문제

중국의 개혁과 개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