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는 살아있다/만주 사변]중국에서 본 잔류 고아
중국에서 본 잔류 고아
구 만주의 대지에 남겨진 잔류 고아를 둘러싸고, 일본에서는 국가의 책임이 문제시 되고 있다. 한편, 중국 사람들의 눈에는 다른 모습으로 보인다.
잔류 고아
종전 시에 구 만주(중국 동북지방)에 살고 있던 약 155만 명의 일본인 가운데, 구 소련군의 침공 등 혼란 속에서 친족과 사별하거나 중국인에게 거두어져, 중국에 남겨진 아이들이다. 일본 후생노동성은 종전 시, 13세 미만이었던 사람을 잔류 고아로, 13세 이상이었던 여성을 잔류 부인이라 규정하고 있다. 1972년 중일국교 정상화 이후, 귀국한 잔류 고아는 약 2,500명을 웃돌았다.
귀국 후 고아들은 일본어 습득 문제 등으로 경제적인 자립이 어려워 생활보호를 받은 사람도 많다. 국가가 조속한 귀국과 자립으로의 지원을 게을리하였다 하여 2002년부터 전국 각지에서 국가 배상 청구 소송이 일어났다. 금년 7월, 고아들과 여당 사이에서 새로운 자립 지원책을 실시할 것을 합의하고 의원 입법 성립을 향한 협의가 진행되고 있다.
일본에 귀국한 잔류 고아가 중국의 양부모에게 감사의 뜻을 담아 1995년에 중국 하얼빈시 교외 팡정현(県)에 세운 중국 양부모 공묘이다. 이 현에서 종전 직후, 많은 일본의 개척단 관계자가 죽은 것으로 알려진다= 사진: 후루야 ()
중일 국교 정상화 35주년을 기념하여 9월 21일 인민일보()가 게재한 잔류 고아의 특집 기사다. 그 은혜는 산과 같이 무겁고, 그 정은 바다와 같이 깊다라는 표제이다.
민족의 너그러움을 보여주는 역사
1981년 4월, 중국 공산당 기관지인 인민일보()에 한 기고가 게재되었다.
중일 우호협회 고문인 쨔오안뽀() 씨가 쓴 전후, 중국에 남은 일본인 고아 문제를 생각한다였다. 이는 중국 주요 미디어가 처음으로 일본인 잔류 고아 문제를 해설 형식으로 전한 기사라고 여겨진다.
기사에서는 그 해에 시작된 일본인 잔류 고아의 육친 찾기 방일 조사를 전하며 이렇게 맺었다. 나는 많은 중일의 친구들이 이해해 줄 것으로 믿는다. 괴로운 전쟁 시대에 중국 인민이 일본 인민에게 보낸 깊은 정은 중일 우호의 더 나은 발전을 위해 큰 의의를 가진다.
그 이후 중국에서 이 문제는 중일 우호의 중요함을 호소는 수단으로써 거듭 전해졌다.
종전 당시, 구 만주에 있던 약 155만 명의 일본인 중, 20만 명 이상이 굶주림이나 추위 등으로 죽었다. 일본 사회가 가지고 있는 귀국에 관한 비참한 기억은 중국에 있는 잔류 고아에 대한 민족의 관용을 보여주는 역사와 표리관계에 있다.
전후, 2,808명의 일본인 아이가 중국에 남겨져 고아가 되었다. 전쟁의 상처로 가득찬 중국인이 그들을 죽음으로부터 구했다. 금년 4월, 일본을 방문한 원저바오(温宝) 수상은 중국 국내에 생중계된 국회에서의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중국 헤이룽장()성 하얼빈의 잔류 고아 관계 연락 조직인 중국 하얼빈시 중국 체류 일본 고아 양부모 연의회(国하얼빈児会)의 이사장인 첸이엉치에() 씨(55)는 누나가 잔류 고아였다. 첸() 씨는 이렇게 강조했다.
당시 왜 중국인은 일본 아이를 양자로 삼았을까. 나도 많은 사람에게 물었다. 아이에게는 죄가 없다. 정말로 불쌍하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귀국을 기뻐하는 모습에 복잡한 심정
이러한 중국 당국의 자세나 관계자의 생각에도 불구하고, 중국인 잔류 고아 문제에 대한 관심은 결코 높지 않다. 중국에서 이 문제에 대한 보도가 활발하다고는 볼 수 없다. 특히 고아들이 육친과 재회하는 장면이 중국 텔레비전에 방영되는 것은 이례다.
그 이유에 대해서, 잔류 고아 문제에 대한 저작을 갖고 있는 베이징우전대학()의 왕후원(歓) 교수(사회심리학)는 중국인 입장에서 말한다면, 이는 프라이드를 손상시키는 면도 있기 때문이다라고 설명했다.
귀국한 잔류 고아는 그 기쁨을 눈물 흘리며 말한다. 일본인에게는 감동적인 장면이지만, 많은 중국인의 심정은 복잡하다고 한다. 그럼, 중국은 지옥인가, 우리 중국인들이 그렇게 당신들을 나쁘게 대하였나라는 생각이 든다. 당연히 민족감정이 드러나게 되고 어색해져 버린다
적지않은 고아들이 귀국 후에는, 중국과의 연락이 소원해지는 것도 그 하나이다. 고아들의 일본 생활은 편하지 않다. 체면도 있고, 연락을 하는 것은 간단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하더라도 중국에서는 풍족한 곳에 가서, 우리들 일은 잊었군이라고 느끼는 사람이 있다
고독한 양부모에게 동정
중국에서 잔류 고아 문제 연구가 본격화된 것은 1990년대 후반에 들어서라고 한다.
2005년에 랴오닝() 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의 장쯔우쿤() 연구원과 꿴야신(亜) 부연구원이 정리한 일본 잔류 고아 조사 연구(사회과학 문헌 출판사)는 중국에서 학문적인 관점에서 이 문제를 정리한 최초의 본격적인 연구서로 평가된다. 중국 정부계의 씽크탱크 중국 사회과학원이 정부의 위탁을 받아 시작한 역사 연구 프로젝트의 일환이다.
일본인 잔류 고아의 역사는 세계사 중에서도 흔치않은 일이 아닌가. 이 만큼 많은 수의 패전국 아이들을, 전승국 인민이 원한을 잊고 양자로 받아들인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다라고 장() 씨는 말했다.
주된 연구 대상으로 선택된 이들은 잔류 고아들의 양부모나 귀국하지 않고 중국에 남은 잔류 고아들이었다. 중국에서 이 문제가 논의될 때는 늘 양부모에게 시선이 간다.
중국의 양부모들은 반드시 생활이 어려워서 곤란해 하는 것만은 아니다. 더 큰 문제는 정신적인 고독이다. 연로한 그들은 자식이 수시로 자신을 찾아와 주기를 바라고 있다. 어떤 형태로든 지원이 필요하다.
이 연구서에는 일본인이 아이를 맡길 때 금전을 양부모에게 건네주었다는 양부의 증언과, 아이를 낳지 못한다는 이유로 고아를 맡았다는 양모의 이야기도 나온다.
중국에서는 노후에 아들이나 딸에게 의지하는 것을 행복이라고 여기는 전통적인 가치관이 강하다. 중국의 지원 관계자는 중국인은 일본으로 떠난 고아들보다, 고아들이 귀국한 후의 양부모들의 생활을 동정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광둥성(広)의 지방 신문 남방도시보()는 2005년 3월에 양부모는 고독 속에서 죽어간다라는 기사를 게재했다. 그 기사 안에서, 창춘()에 사는 81세의 양모는 나는 일본 군인에게 배를 차여서 유산했다.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한다. 그런데, 조그만 여자 아이(고아)를 보았을 때 원한은 머리 속에서 사라졌다. 내가 키우지 않으면, 이 아이는 죽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라고 이야기한다. 1990년 일본에 귀국한 딸은 매년귀향하지만, 한 번에 체재 가능한 날짜는그리 많지 않다. 양모는외롭게 살아 가고 있다라고 기사는 전했다.
원(温) 수상은 일본에서 한 연설에서, 고아들이 양부모에게 감사하고 있다는 것도 언급하며 이런 말을 했다. 우리는 양부모들의 인도주의 정신과 자애의 마음에 깊은 감사를 드리며, 이 은혜를 영원히 잊지 않는다.
이것은 한편으로, 현 중국의 광범위한 국민이 받아 들일 수 있는 감정을 의식한 것인지도 모른다.
(선양()=후루야 고이치 )
앤드류 고든 하버드대 교수
[지식인 20명에 듣는다] 10. 동아시아 근현대사의 10 대 사건은?
모던 걸의 출현, 사회사적으로 중요 - 앤드류 고든 하버드대 교수
약간 변칙적인 형태로 10 사건을 든 것은, 몇 개를 한 세트로 묶는 것이 보다 깊게 역사를 파악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각각의 사건이 단독으로 일어 난 경우도 있습니다만, 지역적•세계적 문맥 안에서 서로 관련되어 있습니다. 전쟁이나 정치적 사건 뿐만이 아니라, 사회구조의 변화를 나타내는 일들에도 배려를 했습니다.
우선, 아편 전쟁과 흑선(黒 미국함정)의 내항은 서구 열강에 의한 세계 시스템에, 동아시아가 경제적, 정치적으로 말려들어 가는 사건으로서 아주 중요합니다. 거기에 일본이 1875년에 이미 강화도 사건으로 참가한 사실도 떼어낼 수가 없습니다.
중국의 태평천국의 난, 일본의 사회개혁 운동, 조선의 갑오농민전쟁은 규모가 달라서 같이 취급하기는 어렵습니다만, 세가지 모두 새로운 세계 질서를 모색하여 각국의 지방에까지 침투해 그 영향이 일반인들에게까지 이르렀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전통적인 이의 제기의 수법과 서구 기원의 새로운 사상•신조가 아우러진 점에서도 공통된 점이 있습니다.
청일, 러일 두 전쟁은 일본의 제국주의에 의해, 동아시아에 새로운 지정학적•경제적 질서가 형성된 10년간으로 일괄해서 파악해야 할 것입니다. 조선의 3•1 운동과 중국의 5•4 운동은, 일본의 패권 앞에서 민족자결을 목표로 한 움직임을 표면화한 새로운 상황이었습니다. 하나로 묶어서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덧붙여서, 이 두 운동에 대해 내가 대학 세미나에서 소개했을 때,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한국계 미국인 학생이 선생님, 5•4 운동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어 놀랐습니다만, 이번엔 중국계 미국인 학생이 하지만 선생님, 3•1 운동은 무엇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내가 열거한 리스트와 같은 방식으로 역사를 파악하는 것은 중요하다라고 통감했습니다.
의 출현은 사소한 일로 생각될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사회 역사적으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실은 그 전에 현모양처의 사상이, 후에는 여성 해방운동이 있었습니다. 모두가 각 나라에서 공통성을 가지고, 서로 영향을 주고 받았습니다. 은 세계 각지에서 거의 때를 같이 하여 나타났습니다. 새로운 도시 생활자로서 그녀들은 상품 구입에 열심이었고, 패션을 바꾸어 가며 문화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주장을 펴기 시작해 남자들을 곤혹시켰습니다. 파라사이트 싱글(Parasite single 기본적 생활조건은 부모에서 의존하고 있는 미혼자) 등을 둘러싼 근간의 논의와 통하는 곳이 있습니다.
만주 사변과 만주국 건설은 아주 중요한 사건으로, 중국과 러시아와의 새로운 긴장 관계를 낳았습니다. 전면 전쟁의 길을 열어 20 세기 아시아의 최대 비극을 낳았습니다. 아시아 태평양 전쟁은 인류의 비극임과 동시에, 아시아에서의 제국주의 시대의마지막을 시작하는 것으로서, 매우 중요한 사건 중의 하나입니다.
이 전쟁에 잇달은 같은 시기의 사건으로, 미국의 일본 점령, 중화 인민 공화국 성립, 조선 전쟁(한국 전쟁)이 관련을 맺고 있습니다. 각 나라들을 격변시켜, 이미 물 밑에서 진행되어 오던 변화를 가속시켰습니다. 그리하여 냉전이라는 새로운 긴장과 대립을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냉전 하에서 진척된 한중일 상호 관계의 정상화 과정은, 아시아에 새로운 경제적•정치적 융합의 민감한 구조를 낳았지만, 이후 추이를 보면 과거를 둘러싼 여러 문제들은 해결되지 않은 채 남겨졌고 지금도 기본적으로는 바뀌지 않았습니다.
일본에서는 1950년대, 한국에서는 60년대, 중국에서는 80년대에 나타난 경제적 대두는, 20 세기의 경제사에서 가장 중요 사건입니다. 최근에는 한층 더 지역적으로, 세계적으로 융합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인터뷰:후쿠다 히로키())
*주 :한국 전쟁은 일본에서는 조선 전쟁으로 부릅니다만, 모두 인터뷰대로 기록했습니다.
약력
미 하버드대 교수 1952 년 생. 1995년부터 현직에 재직 중이다. 저서에는 일본의 200년 등이 있다. 새로운 저서로는 일본인이 모르는 마츠자카() 메이저 혁명이 있다.
내가 선택한 10 대 사건
(1) 아편 전쟁(1840~42), 흑선(黒 미국함정) 내항(1853~54), 강화도 사건(1875)
(2) 태평천국의 난(1851~64), 사회개혁 운동(1850년대~1880년대), 갑오농민전쟁(1894)
(3) 청일 전쟁과 러일 전쟁(1894~1905)
(4) 조선의 3•1 운동과 중국의 5•4 운동(1919)
(5) 모던 걸의 출현(1925)
(6) 만주 사변과 만주국 건설(1931~32)
(7) 아시아 태평양 전쟁(1937~1945)
(8) 미국의 일본 점령(1945~52), 중화 인민 공화국의 성립(1949), 한국 전쟁(1950~53)
(9) 한일 국교 정상화(1965), 일중 국교 정상화(1972), 중한 국교 정상화(1992)
(10) 일본, 한국, 중국의 급속한 경제성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