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철도와 함께 일본군이 몰려 왔다
넓은 홈에 내려서면, 서울까지 56km, 평양까지 205km라는 안내 표시가 눈에 들어온다.
여기는 휴전선에서 가까운 도라산 역이다. 중국 국경에 가까운 북한의 신의주와 한국의 수도 서울을 연결하는 경의선으로, 한국 측의 최북단 역이다. 한국군이 민간인 출입을 제한하는 지역에 역이 있어서, 여기까지 오는 열차는 하루에 3번뿐이다. 신분증명서를 보이고 헌병에게 소지품 검사를 받지 않으면 승객이 될 수 없다.
이 주변은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지뢰밭이었다. 그러던 것이 2000년에 열린 첫 남북 정상회담 이후, 한국 전쟁으로 인해 파괴된 경의선의 일부를 복원하기로 해, 이 역도 5년 전에 새롭게 태어났다. 금년 5월에는 휴전선을 넘어 시험 운행이 있었다. 56년 만에 열차가 남북을 왕래했다. 북으로 이어지는 철로는, 민족 화해의 장을 여는 새로운 무대이다.
홍수로 인해, 남북 정상회담이 10 월 초로 연기되었지만, 한국의 노무현 대통령은 8월 28일, 이 경의선 철도와 나란히 이어지는 도로를 타고 평양에 갈 예정이었다. 남북한 교류의 성과를 보여주고 싶어 하는 인상이 느껴진다.
그런데, 나는 왜 여기에 왔는가.
일본이 언제, 어떻게 한반도를 식민지로 지배하게 되었는가를 조사하는 동안, 철도가 깊숙이 관계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경의선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한다.
식민지 지배의 그늘과 남북 분단, 그리고 융화. 지배의 시작을 찾는 여행의 스타트 지점으로서, 역사가 겹겹이 쌓여 있는 상징적 장소를 봐 두고 싶었다.
지배를 확대하는 도구 / 분쟁의 불씨로
서울에서 일제 침략과 한국 철도라는 저서를 쓴 정재정() 서울시립대 교수를 만났다. 철도가 생겨서 편리하게 되지 않았냐?는 질문을 던지자, 정 교수는 굳은 표정으로 이렇게 대답했다. 한국의 입장에서 보면, 철도와 함께 일본군이 쳐들어왔고, 수탈과 억압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일본은 한반도를 군사상의 생명선이라 생각해, 한반도를 지배하기 위한 도구로서 철도를 깔았다. 또한, 러일 전쟁은 철도를 둘러싼 전쟁이기도 했던 것입니다.
정 교수의 설명은 계속 된다.
열강들에게 있어서, 군과 물자를 대량으로 운반하는 철도는, 지배 지역을 넓히는 중요한 수단이었다. 중국 동북부와 한반도 북부의 철도를 둘러싸고 싸운 것이 일본과 러시아였다. 교섭으로는 결론이 나질 않았고, 전쟁을 부른 원인의 하나가 되었다.
실제로 청일 전쟁 후, 러시아는 중국 동북부를 횡단하여 블라디보스토크에 인접하는 동청철도와 하얼빈으로부터 뤼순()까지를 연결하는 남만주(満) 지선의 부설권을 청나라로부터 손에 넣는 등, 스스로 철도망을 넓히려고 안간힘을 썼다.
일본도, 서울과 반도 남단 부산을 연결하는 경부선과 경의선을 손아귀에 넣으려고 안간힘을 쏟았다. 두 노선으로 한반도 종단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경부선은 청일 전쟁 후에 부설권을 따내서 1901년에 기공했다. 러시아와의 긴장이 고조되면서, 공사를 빠른 속도로 진행시켰다. 경의선은 대한제국 정부가 조선 민족의 자력으로 건설하려 하고 있었지만, 자금 부족으로 좀처럼 진행되지 않고 있었다.
당시의 공문서에서 일본 정부의 의도를 분명히 읽어낼 수 있다. 예를 들어, 1902년, 고무라 주타로(寿郎) 외상이 가쓰라 다로(郎) 수상에게 제출한, 내각회의에서 결정된 문서에는 이러한 취지가 쓰여 있다.
경의철도를 우리 손으로 부설해, 경부선과 연락시키면 한국을 관통하는 간선철도는 모두 제국의 것이 되며, 이는 한국을 우리의 세력 범위에 두는 것과 같다.
이듬해, 러시아와의 교섭 방침을 둘러싼 내각회의에서는 향후 한국 철도의 만주 남부로의 확장에 대해, 러시아가 방해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기로 결정하였다. 이른바, 한반도에서 더 나아가, 중국 동북부로 선로를 늘려 세력권을 확대시키자는 것이었다.
1904년 2월, 러일 전쟁이 시작된다.
개전 전, 대한제국은 전쟁에 휩싸이지 않으려고 중립을 선언했다. 그러나 일본은 이를 무시하고 러시아에 선전포고를 하기 2일 전에 인천에 선발대를 상륙시켰고, 후발 부대를 포함해 전체 1만여 명의 병력이 수도와 그 주변에 몰려들었다. 점령이라고도 할 수 있는 상황으로, 전쟁이 시작된 약 2주 후에는 한일의정서를 체결, 일본이 군사 전략상 필요한 지점을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도록인정하게 하였다. 단적으로 말하면, 일본군이 이 토지는 필요하다.라고 간주하면, 일본군의 것이 될 수 있게 된 것이다.
현안이었던 경의선에 대해서, 일본은 대한제국에게 군용 철도로서 만드는 것으로 통고하고, 철도 대대가 공사에 착수했다.
식민지 지배의 시작 / 러일 전쟁으로부터
철도와 식민지 지배의 역사가 겹치는 장소를 방문하고, 서울시내의 용산구로 향했다.
용산구에서 용산 역 동쪽 부근은 한국 지도에서 공백으로 처리되어 있다. 거대한 주한미군 기지가 있기 때문이다. 도로 가에는 철조망과 콘크리트, 벽돌로 쌓은 벽이 계속 된다.
이 일대는 러일 전쟁이 한창일 때, 일본군이 토지를 수용해 군사시설을 만든 곳이다. 그로부터 100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민중이 자유롭게 드나들지 못하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일본군은 왜, 용산을 선택했을까?
서울대에서, 김백영() 연구원이 낡은 지도를 보여 주며 가르쳐 주었다. 지역의 관문 역할을 하는 용산 역은 당시, 한반도 철도의 매듭 역할을 담당하여, 경의선 등도 여기에서부터 이어졌다. 왕궁에도 위압을 보일 수 있는 위치였다. 왕을 위압해서, 철도로 한반도 각지로 이동하기 쉬운 곳에 일본군은 거대한 군사 거점을 쌓아 올렸습니다.
또 하나의 중요한 노선인 경부선은 1905년 1월에 완성되었고, 같은 해, 일본의 시모노세키를 오가는 연락선 운항도 시작되었다. 다음 해 4월에는 경의선도 전선이 개통되었다.
러일 전쟁을 포함한 불과 몇 년 안 되는 동안, 한반도를 남북으로 관통해 중국 동북부를 잇는 약 950km의 간선철도를 만들어 냈다. 일본의 신간선으로 치면, 도쿄 역(駅)에서 신야마구치 역(駅) 부근에까지 해당하는 거리다. 육로로는 말 등을 이용해 무기와 식량을 옮겼던 것을, 대륙 입구까지 대량 수송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군과 물자를 옮기는 동맥을 만들어 낸 것만이 아니다. 일본군은, 전선으로의 물자 수송과 철도 연선의 경비 등을 구실로 주둔군을 편성하여, 대한제국으로부터 수도의 경찰권도 빼앗았다.
러시아와의 전쟁이 끝나고도, 일본군대는 철수는 커녕, 2개 사단 규모의 약 3만 명의 육군 부대가 눌러 앉았다. 또한, 대구, 부산 등 연선을 중심으로 광대한 토지를 차례차례로 수용해, 군사 거점으로 삼았다.
서울 사무소에서 만난 친일반민족 행위 진상 규명 위원회의 서민교(教) 전문위원은 러일 전쟁이 시작됨과 동시에, 한국은 사실상, 일본군의 손아귀에 들어가 식민지화가 진행되었다.라고 이야기한다. 그런 이유로 위원회가 조사 대상으로 하고 있는 일제 강점(일본에 의한 식민지 지배) 기간도, 1904년 2월 러일 전쟁 개전에서부터 1945년 8월 해방까지로 정하고 있다.
즉, 한국에서는 식민지 지배의 시작을 1910년 한일합방 조약 체결부터가 아니라, 러일 전쟁에서부터라고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농민이 힘든 노동을 / 저항 운동의 대상으로
조선 민중의 눈에 철도 건설은 어떻게 비쳤을까?
일본의 역사 교과서 문제를 계기로, 20년 전에 만들어진 한국의 독립기념관(천안시)을 7 월 초에 찾아갔다. 광장에는 총을 겨냥한 일본병사와 기둥에 묶여 처형당하는 민중의 등신대 인형이 서 있었다. 설명 판을 보니, 8월 말까지 하는 기념 전시로서 일제가 한국 침략을 위해서 깐 철도를 파괴하여, 1904년에 순국한 애국지사의 처형 모습을 재현했습니다.라고 적혀 있었다. 러일 전쟁이 한창일 때, 수도 경의선 부근에서 공개 총살된 3명은 지금, 일본의 식민지화에 저항한의병이라 기리어, 처형 장면의 기록 사진은 한국의 역사 교과서에도 등장한다.
철도는 민중으로부터 농지를 빼앗은 것만이 아니었다. 일본 군인과 업자는 주로 감독 역을 하고, 현장에서의 힘든 노동은 억지로 모으다시피 한 농민들의 몫이었다. 이러한 수법은 민중의 반발과 미움을 불러와, 일본 지배에 저항하는 의병 투쟁의 공격 대상이 되었다. 애를 먹은 일본군은 철도를 부순 사람과 그들을 숨겨준 사람을 사형에 처하는 군령도 내렸고, 실제로 처형했다.
경부선이 통과하는 서울 교외의 안양시. 마을 풍경이 내려다보이는 작은 언덕에 서 있는 비석에서 이토 히로부미()라는 이름을 찾아냈다. 비문에 따르면, 1905년 11월, 이토()가 경부선 열차로 안양을 통과한다는 것을 안, 마을 출신의 원태우가 열차에 돌을 던져 이토()가 부상을 당했다고 한다. 비석은 고문을 받고 투옥되어 불우한 생애를 보낸 지사의 위업을 후세에 전하기 위하여, 현지 주민들이 15년 전에 세운 것이다.
전 수상 이토()는 대한제국으로부터 외교권을 강탈하고 보호국으로 삼는 제2차 한일 협약(을미 조약) 조인을 강요하기 위해 특사로 와 있었다.
그 이토()가 안중근에게 살해된 것은 10개월 후인 1910년 8월 22일이다. 대한제국의 마지막 어전회의가 열려, 합병 조약 체결을 승인했다. 지금은 세계 유산이 된창덕궁한 쪽에 회의 장소였던 곳이 있는데, 설명 판에는 한일 합병을 결정한 비운의 장소라고 쓰여 있었다.
이듬해, 한반도와 중국 대륙을 가로지르는 압록강의 가교 공사가 완성되었다. 부산에서 중국 동북부까지가 레일로 연결되었다. 일본은 대륙 침략으로 뻗어 나갔다.
(나카노 아키라 )
다케시마(한국명:독도) 문제 민족의 존엄성과 관련
일본해(한국에서는 동해라고 부르고 있으나, 일본에서 일본해로 표기하므로 일본어 표기로 함)에 떠있는 바위투성이의 고도이지만, 그 영유권을 둘러싸고 한일은 심하게 대립하고 있다. 거기에는 일본에 의한 식민지 지배라고 하는 역사 문제의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일본 패전 후인 1946년, 연합국 군총사령부(GHQ)는 각서에서, 일본의 행정권을 정지하는 지역에 다케시마를 포함시켰다. 그러나 1951년에 서명한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에서는, 일본이 포기하는 섬에 독도는 명기되지 않았다.
이 때문이었는지, 1952년 조약 발효 전, 한국의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공해 상에 이() 라인 (한국에서는 평화선)을 설정하고, 독도를 한국 쪽으로 넣었다.
그 당시부터 한일 국교 정상화 교섭에서는 독도 문제가 최대 난관의 하나가 되었으며, 결국 영유권 문제는 보류한 채로 국교를 맺었다.
독도 문제를 일본은 영유권 분쟁이라고 단순히 인식하지만, 한국에서는 민족의 존엄성이 얽힌 역사 문제인 것이다.
그 계기가 된 것은 독도의 시마네현(県) 편입을 언명한 1905년의 내각회의 결정과 현(県) 공시였다. 때는 러일 전쟁이 한창 진행 중이었으며, 일본이 한국의 외교권을 빼앗고 보호국으로 만들었던 해로, 5년 후의 병합으로 치달려 간다.
이 때문에 한국은 독도를 강탈 피해 제1호로 간주하고 있다. 2005년 시마네현(県) 의회가 편입 100주년을 기해 독도의 날조례를 가결한 것에 대해, 한국 측이 격렬하게 반발한 것은, 이로 인한 것이다.
고스케 고이치
친일반민족 행위 진상 규명 위원회
과거사의 재검토를 진행하는 노무현 정부 아래,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협력한 자와 그 행위를 조사하기 위해 특별법에 의해 2005년 5월 발족했다. 위원은 학자나 변호사 등 11명이다. 조사 스태프도 있다. 임기는 4년이나 연장도 가능하다. 이 위원회와는 별도로, 일제에게 협력한 대가로 손에 넣은 재산을 조사하여, 그 자손들로부터 몰수하여 나라의 것으로 하는 친일반민족 행위자 재산 조사위원회가 있다.
식민지
어떤 민족과 국민의 일부가 다른 토지로 이주하여, 새롭게 만든 도시와 마을을 의미하였으나, 15 세기신대륙발견 이후, 본국 외에 그 지배하에 있는 지역도 가리키게 되었다. 19 세기 후반 이후, 구미 열강은 원료를 손에 넣으며 제품을 파는 시장으로 본국과 먼 아시아, 아프리카, 태평양 지역에서 식민지 획득 경쟁을 펼쳤다. 그러나 일본처럼, 고대부터 교류가 있는 이웃나라를 식민지 지배한 예는 보기 드물다.
[역사는 살아있다/러일전쟁]명성황후를 알고 있습니까
기억을 만드는 것 - 명성황후를 알고 있습니까.
한국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다. 중국에서는 최근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럼, 일본에서는. 이번 연재에서는 일본 정부 관계자 등에 의해 살해된 조선의 왕비에 대해서 알아본다.
식민지 사관으로부터 한발 물러서서 그리다
살해된 왕비의 이름은 명성황후(). 일본인에서는 민비()라고 하는 편이 알기 쉬울 것이다. 그녀를 둘러싼 사건은 러일 전쟁으로 향하는 서곡이 되었다.
청일 전쟁 후, 러시아는 일본의 중국 진출을 경계하여 조선에 접근했다. 당시 조선의 권력자가 반일파인 민비였다. 1895년 10월, 미우라 고로(楼) 공사를 수모자로 하는 집단이 왕궁으로 난입해, 눈에 거슬리는 존재였던 민비를 살해하기에 이른다. 명성황후란 사후에 주어진 칭호이다.
그러나 시아버지인 대원군, 남편인 국왕 고종을 제쳐 두고 권력을 잡은 모습은, 유교 사상이 강한 한국에서 부정적인 이미지로 인식되어 왔다고 한다.
사건으로부터 100년이란 세월이 흐른 1995년. 그러한 이미지를 뒤집은 한국산 뮤지컬 명성황후가 등장했다.
기획 제작을 담당한 연출가 윤호진(鎮) 씨는 (최근) 다양한 외국 사료를 접하면서, 떠오른 그녀의 모습은 국제 감각에 뛰어나고, 조선의 미래에 확고한 이상을 그리는 모습이었다.라고 이야기한다.
무대는 화제가 되어, 금년 3월에는 한국 뮤지컬 사상 처음으로 관객 100만 명을 돌파했다. 이 작품이, 국내에서의 호칭이 민비에서 존칭인 명성황후로 바뀌는 계기가 되었다라며 윤 씨는 자랑스러워했다.
뮤지컬에 자극을 받아 한국방송공사(KBS)는 2001년부터 02년에 걸쳐, 드라마 명성황후를 방영했다. 인기 여배우 이미연(妍)이, 향학심이 넘치는 총명한 황후 상을 연기하여 대히트를 쳤다. 명성황후라 하면 그녀를 떠올리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KBS의 윤창범() 프로듀서는 종래의 (명성황후의) 이미지는 일본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러한 식민지 사관으로부터 벗어나, 명성황후 상을 그려내는 것이 큰 목적이었다.라고 말했다. 방송도 월드컵 축구 한일 공동개최에 맞추었다. 한일 양국이 지금보다 더 서로를 아끼고 양보하기를 기대하면서도,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역사가 존재한다는 것을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의도가 있었다.
이러한 명성황후의 재평가 움직임은 왜 일어났을까.
명지대의 홍순민() 부교수(한국사)는 역사학계의 근대사에 대한 관심의 고조와 역사에서 여성의 역할에 대해 인정하는 분위기가 영향을 미쳤다.라고 본다. 단지, 역사 연구가 충분하지 못한 상황에서 예술 작품화 되어, 과도하게 미화된 면도 부정할 수 없다.
드라마로 중국에도 침투
명성황후를 둘러싼 뮤지컬, 드라마는 해외에도 진출했다. 특히 드라마는 아시아를 석권 한 한류인기를 타고, 대만, 중국에서도 대히트를 했다.
중국에서도 민비가 일반적이었고, 당초 명성황후라 하면, 누구냐고 묻는 상황이었다.라고 고마자와(沢) 대학의 전임 강사(미디어론)인 가오 유웬() 씨는 말한다. 그랬던 상황이, 일본에서의 겨울 연가처럼, 대 반향을 불러일으켜, 명성황후란 호칭은 단번에 침투했다.
근대사에 있어서, 일본과 대적한다는 의미로, 한국과 중국은 서로 겹치는 부분이 많다. 또한, 한 여성의 삶을 그린 이야기로서도 많은 여성들에게 지지를 받은 것 같다.
한편으로는, 당시의 청나라를 묘사한 방법 등을 둘러싸고 논의도 일어났다고 한다.
사건의 당사자이기도 한 일본에서는 어떠할까. 오쓰마() 여자대학 전임 강사(근대 일본어 문학)인 나이토 지즈코(内) 씨는, 명성황후는 당시의 일본 신문에 의해 부정적인 이미지가 날조된 사실을 저서인 제국과 암살에서 밝히고 있다.
그 후, 일본에서의 명성황후의 이미지는 제로에 가까웠다. 거기에 존재하고, 알면서도 보지 않으려는 역사 인식의 문제가 한일 역사 속에 가로 놓여 있다. 명성황후는 그 상징적인 존재라고 생각한다.
한국의 엔터테인먼트는 지금의 일본에서는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러나 명성황후를 그린 드라마, 뮤지컬을 둘러싸고는 현재, 방영, 상연의 움직임은 없다.
한국에서는 누구나 알고 있는 사건을, 가해자 측인 일본에서는 그런 사건이 있던 것조차 일반적으로는 알려지지 않았다.그런 놀라움을 계기로 작가인 쓰노다 후사코() 씨는 논픽션민비 암살을 집필했다. 각오는 했지만, 예상을 훨씬 넘어, 많은 공격을 받았습니다.라며, 약 20년 전의 출판 당시를 되돌아본다. 그러나민비 암살이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자, 일본의 역사 교과서 기술에도 영향을 주었다.
그렇게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겨우라고 생각하실 지도 모릅니다만, 나에게는 큰 한 걸음이었습니다.
사쿠라이 이즈미 桜, 니시 마사유키
일본해 해전과 미카사() 전승의 상징으로 매년 10만 명 방문
러일 전쟁이라고 하면, 많은 일본인이 머리에 떠올리는 것은 일본해(한국에서는 동해라고 부르고 있으나, 일본에서 일본해로 표기하므로 일본어 표기로 함) 해전이 아닐까. 해전이 벌어졌던 5월 27일은 해군 기념일이었다. 육군이 봉천()(현 중국의 심양())을 점령한 3월 10일은 육군 기념일로 지정되어, 쇼와()의 패전까지 전승의 기억으로 화제가 되었다.
해전에서, 도고 헤이하치로(郷郎) 연합 함대 사령장관이 승선한 기함 미카사()는 현재, 기념함으로 복원되어 가나가와현(県) 요코스카시(横)의 해변 공원에 있다=사진. 군함의 앞부분은 황궁 쪽을 향하고 있다. 기념함을 운영하는 미카사 보존회에 의하면, 방문객 수는 2005년의 동해 해전 100주년을 계기로 2년 연속 10만 명을 넘었다. 가족 동반과 학생들이 증가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라고 한다.
전 해상 자위관인 다카하시 세이치() 홍보 계장은 선조의 노력으로 일본의 안전과 독립이 지켜진 것을 아이들이 알았으면 한다.고 말한다.
올해도 5월 27일 일본해 해전 기념식이 열렸다. 내빈인 아라카와 교이치() 해상 자위대 요코스카 지방 총감은 동해 해전은 러시아의 지배로부터 일본과 아시아를 구하고, 대항해 시대로부터 이어진 서양의 세계 제패 역사에 파문을 일으켰다.라고 인사말을 했다.
러일 전쟁이라고 하면, 시바 료타로(郎)의 대표작 언덕 위의 구름()에서도 중요한 무대가 되었다. 시바() 씨는 언덕 위의 구름의 맺음말에 이렇게 쓰고 있다.
승리를 절대화 하고, 일본군의 신비적인 강력함을 신앙하게 되어, 그 부분에 있어서 민족적으로 치매화 되었다. 러일 전쟁을 전환점으로 일본인의 국민적 이성이 크게 후퇴해 광란의 쇼와()기로 접어든다.
언덕 위의 구름은 NHK가 드라마로 만들어, 2009년부터 3년에 걸쳐서 방송된다.
나카노 아키라 )
명성황후 살해 사건(을미사변)
조선 왕조의 실권을 잡고, 배일•친러 정책을 취하던 명성황후에 대해,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楼)는 명성황후의 정적인 대원군을 옹립하여 친일 정권을 만들려는 획책을 하였다. 1895년 10월 8일 이른 아침, 일본군 수비대, 경찰관 등을 포함한 일련의 집단이 왕궁인 경복궁을 습격하여 명성황후를 참살했다. 친일 정권이 들어서기는 했지만, 궁정 내에 있던 미국인, 러시아인들이 사건의 자초지종을 목격하였기에 국제적인 비난을 받았다. 일본 정부는 미우라 등 관계자를 귀국시켜 재판에 회부했지만, 증거 불충분으로 면소, 석방되었다. 친일 정권은 민중의 반일 의병 투쟁으로 무너지고, 다음 해인 1996년에 친로파 내각이 탄생했다.
[역사는 살아있다/러일전쟁]첸 카이게 영화감독
시리즈 지식인 20명에 듣는다(6) 동아시아 근현대사의 10대 사건은?
일본의 급속한 근대화 나에게는 수수께끼-첸 카이게( ) 영화감독
구미 열강이 새로운 세계 시장을 만들기 위해 일으킨 것이 아편 전쟁으로, 아시아 최대의 시장으로서 중국이 선택되었다. 중국은 화이질서 안에서 외국을 오랑캐로 간주하는 교만한 나라로, 열강이 들어 왔을 때는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중국인에게는 치욕이지만, 실패의 원인을 생각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해양 국가로서 국토 침범을 받지 않았던 일본에게 있어, 페리의 내항은 상당한 충격이었다. 아편 전쟁의 영향을 받아, 일본은 내정 개혁과 대외 개방, 서양화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메이지 유신이 없었다면, 일본은 멸망했을지도 모른다. 나에게 수수께끼인 것은, 다른 나라라면 200~300년 걸릴 변화가, 페리 내항으로부터 30년 정도밖에 되지 않은 시간에 일본에서 일어난 것이다.
메이지의 통일 국가 형성은, 동북아시아에서 처음으로 근대국가가 성립했다는 것에 의의가 있다. 청조가 중체서용() 등 전통을 둘러싼 논쟁을 하고 있었을 때, 일본은 급속히 근대화를 완성시켰다. 문화적인 요인이 있었는가. 나는 이 큰 변화의 수수께끼를 이해할 수 없었다. 일본 민족의 특징은 실패에서 배우는 점이라 생각한다. 백촌강()의 전투(663년)에서는 당나라에게 배웠고, 페리 내항에서는 서양에게, 제2차 대전의 패전으로 미국에게 배웠다.
대국 중국의 무술변법(変)), 캉유웨이(為) 등의 입헌 군주제 시도는 실패했다. 동 시대의 중일 양국에서 일어난 일은 정반대로,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다.
그 후, 부국강병을 실현한 일본은 약자인 중국에게 전쟁을 도발했다. 중국에서는 몸에 흉기를 지니면 반드시 살심이 생긴다.라는 말이 있다. 양국의 전쟁은 동북아시아 천년의 역사에서 가장 비참한 사건이다. 천년이나 지속된 힘의 관계를 부수어 버렸다.
이 전쟁의 직접적인 결과가 미군에 의한 일본의 점령이다. 미국에서는 1850년대부터 태평양을 내해(内)로 한다는 구상이 있었지만, 이는 약 100년 후의 점령에 의해 완성되었다.
여기까지의 사건에서 많은 교훈을 얻을 수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중국이 어떻게 외래문화와 영향에 대처했는가. 중국이 어떤 식으로 스스로의 문명과 역사와 전통을 판단하였는가 하는 것이다. 아편 전쟁 이후의 중국은 실패의 연속이었다. 그것은 부패한 전통 문화뿐 만이 아니라, 중국이 세계의 흐름에 한 발 늦었기 때문이다. 150년에 걸쳐 대를 이어 비극이 전해져, 자신감을 잃고 천명에 맡길 뿐이었다.
중소와 미일의 동맹 관계는 겉보기에는 공산주의와 자유주의의 이데올로기 대립이지만, 중요한 것은 아시아가 서구와의 동맹 없이 스스로의 안전을 유지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진보인가, 퇴보인가.
어린 시절에 읽은 독일 철학에는 악이 역사의 진보를 재촉한다.라고 쓰여 있었다. 나를 포함해서 문화대혁명으로 괴로움과 번민이 많았지만, 그래도 문화혁명은 중국과 동아시아의 역사에 적극적인 의의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문화혁명의 격렬한 충돌과 모순이 없었다면, 그 후의 큰 변화도 없었기 때문이다.
개혁•개방은 중국인에게 수백 년간 찾아오지 않았던 실질적인 이익을 가져왔다. 경제와 정신, 양면의 변화와 중국인에게 새로운 자신감을 주었다. 당연히, 중국의 뿌리 깊은 천조 사상(왕조 의식)도 나왔다. 하지만, 중국의 발전은 초보적인 단계에 지나지 않는다. 중국인의 국민적 자질을 높여 가야만 한다.
가까운 장래에 아시아 공동체의 실현은 어렵겠지만, 한중일의 역사적 혼돈 속에 축적된 문화의 힘이 분출할 것이다. 유교 문화권은 큰 힘을 가지고 있다.
인터뷰: 다무라 히로쓰구
첸 카이게 영화감독 약력
1952 년생. 문화혁명으로 지방의 계몽운동에 투입되어, 군대 경험도 있다. 1984년의 황토지()가 데뷔작이다. 경극의 명 여배우를 그린 메이란팡()을 제작 중.
첸 카이게 영화감독의 내가 선택한 10 대 사건
아편 전쟁
페리 내항과 일본의 개국
일본의 막부 종말과 통일 국가의 형성
무술변법과 실패
중일 전쟁
미군의 일본 점령
중소, 일미의 동맹 관계
문화대혁명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원자바오(温宝) 수상, 아베 신조() 수상의 상호 방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