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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독립운동가 후손

Posted September. 22, 2004 2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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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보훈처가 매달 이달의 독립운동가를 선정해 그 뜻을 기리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 9월의 독립운동가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초대 재무총장에 선임됐으나 사양했던 최재형(18581920) 선생이다. 함경북도 경원의 빈한한 가정에서 태어난 선생은 9세 때 부모 손을 잡고 두만강을 건너 연해주로 이주했다. 이국땅에서 온갖 고생 끝에 큰 재산을 모은 그는 이름도 표트르라는 러시아식으로 바꾸고 황제까지 알현할 정도로 극동지역의 유력 인사가 됐다.

연해주에서 항일독립운동을 이끌던 선생은 일본군에 체포돼 총살되는 비운을 맞는다. 이후 러시아 땅에 남은 선생의 자녀 11남매는 온갖 고난을 겪어야 했다. 1930년대에는 다른 한인들과 함께 낯선 중앙아시아 땅으로 강제 이주됐다. 선생의 친손자인 재료공학자 최 발렌틴 박사(66)는 할아버지가 한국의 독립운동가였다는 사실조차 숨기고 살아야 했다고 회고한다. 그러나 현재 재()러시아 독립유공자후손협회장을 맡고 있는 최 박사에게는 더욱 씁쓸한 기억이 있다.

1990년 한-러 수교 후 최 박사는 우리 정부가 이미 1962년에 할아버지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고 감격해 했다. 조국이 할아버지의 공적을 잊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그동안의 고생이 모두 보상되는 듯했다. 그러나 후손들이 냉전시절 교류가 없던 러시아에 살고 있는 점을 악용해 한국에서 가짜 후손이 무려 30년 가까이 각종 보훈 혜택을 챙겨 온 사실을 알고 경악했다. 진짜 후손인 최 박사 가족이 나타나자 한국 정부는 뒤늦게 훈장을 다시 수여했다.

가짜 후손들을 직접 찾아가 따지려 했던 최 박사는 이내 마음을 고쳐먹었다. 할아버지가 보상을 바라고 독립운동을 한 것도 아닌 데다 후손들이 명예를 되찾은 것으로 충분하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최 박사는 현재 러시아정부에서 받는 월 20만원도 안 되는 연금으로 어렵게 살면서 러시아를 근거로 활동했던 애국지사들의 자료를 정리하는 데 여생을 바치고 있다. 오랫동안 조국으로부터 잊혀져 별다른 보상도 받지 못했지만 머나먼 이국에서 자존심을 지키며 살아온 최 박사 가족이야말로 진정한 독립운동가의 후예가 아닐까.

모스크바=김기현 특파원 kimkih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