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산둥성 취푸-태산
공림에 있는 공자 무덤 앞 비석.
● 노벽을 찾아서
인구 10만 소도시 취푸는 춘추시대에는 노나라 수도이자 2000년 넘게 유교의 총본산으로 여겨져 왔다. 지금은 삼공을 찾아오는 관광객들로 도시가 먹고 산다. 곳곳에 공자님 말씀이 가득하다. ‘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 ‘유붕자원방래(有朋自遠方來)’ ‘온고지신(溫故知新)’ ‘삼인행필유아사(三人行必有我師)’ 같은 논어 구절이 가판대에도, 벽에도 써 있고, 가로등에도 달려 있다. 밤이 되면 수양버들 가지에 늘어뜨린 문구에 조명이 들어와 밝게 빛나니 진정 ‘공자의 도시’가 맞다는 생각이 든다.
취푸 제녕대학교 본관 앞에도 공자와 제자들 조각 군상이 있다. 제녕대에서는 한국 무우수(無憂樹)미술협회와 중국 제녕학원, 곡부미술협회가 주최한 한중문화교류 전시회 ‘유풍묵운(儒風墨韻)’이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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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묘 가는 길에 가장 먼저 만나는 건 곡부명고성(曲阜明古城)이다. 군사 방어 목적이 아니라 유교 성지를 보호하고 권위를 높이기 위해 쌓은 성이다.
공자의 위패와 상이 모셔져 있는 대성전.
행단 다음에는 3층 목조 누각인 규문각(奎文閣)이 나온다. 역대 황제가 하사한 글씨와 그림, 서적을 보관한 도서관이었다. 우리나라 창덕궁에도 정조가 지은 도서관인 규장각(奎章閣)이 있었다. 규(奎) 자는 고대 별자리 가운데 문명과 학문을 상징한 규성(奎星)에서 따온 말이다. 도서관은 ‘문명의 별이 빛나는 곳’이란 뜻이리라.
7개의 문과 정원을 통과해 드디어 대성전에 다다랐다. 공자의 상과 위패를 모신 전각이다. 우리나라 사당에는 보통 위패만 모셔져 있는데, 대성전 안에는 미소를 짓고 있는 공자 조각상이 여행객을 맞이한다. 당 현종은 공자가 죽은 뒤 문선왕(文宣王)으로 추증했다. ‘글을 널리 펼쳐 보급한 왕’이란 뜻이다. 그래서 대성전 규모는 베이징 자금성 태화전(太和展)에 버금갈 정도다. 지붕에도 황궁에나 쓴다는 황색 기와를 사용했고, 정면 10개의 기둥에는 하늘로 솟구쳐 오르는 용이 투각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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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시황의 분서갱유 당시 유교경전을 숨겼던 노벽.
● 공자가 안회를 사랑한 까닭은
공묘 동쪽에는 공부가 있다. 공자 적손(嫡孫)들에게는 연성공(衍聖公)이라는 벼슬이 대대로 세습됐다. 공부는 연성공의 행정집무실이자 후손들이 대대로 살아온 저택이다. 공묘와 공부를 둘러본 후 마지막에 다다르는 곳은 공림이다.
공림 안팎으로 10만 그루에 이르는 소나무, 측백나무, 편백 같은 고목이 우거져 있다. 공림이 ‘공자의 숲’인 줄 알았다. 그런데 중국에서 림(林)은 묘지를 뜻한다고 한다. 우리는 흙으로 돌아간다고 표현하는데, 중국인은 숲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취푸 도심에서 북쪽으로 약 1km 떨어진 공림은 총연장 7.25km 담장 안에 약 10만 기의 무덤을 품고 있다.
공림에 있는 공자 무덤 옆에는 제자인 자공(子貢, BC 520∼456년)이 6년상을 치르며 머물렀던 건물 자공여묘처(子貢廬墓處)가 있다. 당시 자공이 직접 심었다는 수령 2500세 측백나무도 건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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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석을 자세히 보니 수많은 깨진 조각을 이어 붙인 흔적이 있다. 1966년 문화대혁명 당시 ‘파사구(破四舊·낡은 것을 깨부수자)’를 외치는 홍위병들이 공자 무덤을 파헤치며 산산조각을 냈다. 공림 출입구 붉은 벽에는 총탄 자국이 남아 있다. 수많은 묘역 부장품이 약탈당했다고 한다.
취푸에는 공자의 흔적만 있는 게 아니다. 누항(陋巷)에는 공자의 수제자 안회(顔回) 사당이 있다. 공자는 논어에서 안회에 대해 ‘한 바구니의 밥(단사·簞食)과 한 표주박의 물(표음·瓢飮)로 하루를 견디면서도 배움의 즐거움을 잃지 않았다’고 했다. 단사표음이란 고사성어 그대로 누항은 지금도 소박한 골목길이다.
누항에서 안회의 78대 직계후손 안팅간(颜廷淦) 선생과 함께 안회 사당 복성전(復聖殿)과 집안 곳곳을 둘러보았다. 점심을 같이 먹으며 “공자가 안회를 가장 사랑한 이유는 무엇인가”라고 물었다.
“안회는 공자의 중심 철학 인(仁)을 생활 속에서 실천한 인물이었다. 다른 이들은 며칠 하다 그치지만 안회는 가장 오래, 집착할 정도로, 가장 높은 경지로 지켰다. 공자는 안회가 유쾌하고 즐겁게 인을 실천하는 것을 사랑했다.”
갈색 항아리 속에서 숙성되고 있는 공부가주.
● 태산이 높다 하되
태산 정상에서 내려다본 풍경.
중국에는 오악(五嶽)이 있다. 서쪽 화산(華山), 동쪽 태산(泰山), 남쪽 형산(衡山), 북쪽 항산(恒山), 가운데 숭산(嵩山)이다. 그중 태산이 으뜸이다. 황제가 하늘과 땅에 제사 지내는 봉선(封禪) 의식을 행하던 장소였기 때문이다.
진시황은 천하통일을 완수했음을 알리는 봉선의식을 태산에서 처음으로 했다. 이후 한무제, 광무제, 당 고종, 당 현종, 청 건륭제 등이 태산에 올랐다. 봉선의식 후 가뭄, 홍수, 지진 같은 재해가 발생하면 하늘이 황제 통치를 거부했다는 신호가 되기에 감히 시도조차 못한 황제도 많다. 태산 밑 대묘(岱廟)에는 청 강희제가 1689년 태산에서 제사를 지내는 행렬을 그린 벽화가 그려져 있다. 만주족 출신 황제가 680년 만에 봉선의식을 행함으로써 “하늘이 나를 황제로서 인정했다”는 사실을 만방에 알린 이벤트였다.
태산에 오르려면 7800계단을 걸어야 한다. 대부분 중천문까지 셔틀버스를 타고 간 뒤, 남천문까지 걸어 올라가거나 케이블카를 이용한다. 태산은 최고봉인 옥황봉(玉皇峰)을 비롯해 곳곳에 벽하원군(碧霞元君)을 모신 사원이 있는 도교의 성지다. 그러나 유학자들의 성지이기도 하다. 이는 공자와 관련이 있다.
태산 정상 부근에는 공자가 제자들과 함께 올랐다는 첨노대(瞻魯臺)가 있다. 첨성대(瞻星臺)가 ‘별을 바라보는 관측소’인 것처럼, 첨노대는 노나라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곳이었다.
수많은 황제와 문인의 글씨가 새겨진 태산 대관봉에는 ‘공자께서 동산(東山)에 오르니 노나라가 작아 보였고, 태산(泰山)에 오르니 천하가 작아 보였다’는 문구도 새겨져 있다.
맹자 진심편(盡心篇) 내용으로, 군자가 수양하는 단계에 따라 시야가 확장되는 것을 상징하는 말이다. 동산을 올랐을 때 개인에서 국가로 확장됐다면, 태산을 오른다는 것은 인간 정신의 최고 경지에 도달해 우주적 관점을 갖게 된다는 비유다.
양사언의 시조 ‘태산이 높다 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에서도 ‘오르고 또 오르면’을 강조한다. 태산 등산은 군자가 수양을 통해 도를 완성해 나가는 것을 상징한다.
태산에 있는 바윗돌이 허공에 떠 있는 신선교.
글·사진 산둥성=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