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원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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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대는 이달 9일 서울 시내 대형 영화관을 빌려 새 입시전형을 공개했다. 기업의 신제품 발표회를 연상케 하는 무대에서 야심 차게 준비한 문구가 화면에 떴다. “이제 수능 잘 볼 걱정 없이 안심하고 지원하세요.”
요즘 입시 제도를 잘 모르면 시험 잘 볼 걱정을 왜 하느냐고 되물을 수 있다. 하지만 매년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이 끝나면 기대 이상의 점수를 받고 울지도 못하는 수험생이 적잖게 생긴다. 학생부 위주인 수시 전형에 먼저 합격하면 수능 위주인 정시 전형에 지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른바 ‘수시 납치’다.
수시 납치 피하려 매년 눈치싸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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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어 수능 전 수시를 치르는 A대와 수능 후 수시를 치르는 B대, 그리고 C대의 정시 전형에 지원했다고 가정해 보자. 수능 점수가 기대보다 잘 나와 B대 수시를 포기했다가 자칫 A대에 합격하면 C대 역시 포기해야 한다. 이런 계산을 하면서 수시 6곳, 정시 3곳을 지원해야 하니 사교육 컨설팅 없이는 입시 전략을 짜기 어려운 게 현실이다.
오락가락하는 수능 난이도 역시 변수다. 2014, 2015년처럼 수능 만점자가 수십 명씩 나온 ‘물수능’에선 수능 문제를 거의 다 맞히고도 수시에 합격했다는 이유로 정시에 지원조차 못 하는 수험생이 속출한다. 이들 중 상당수는 입시 결과에 만족하지 못해 재수를 택한다. 수능 등급과 백분율이 수시 전형을 모두 마친 후 나오는 것도 문제다. 결국 수능 가채점 결과만 손에 쥔 채 사교육 전문가의 도움을 받으며 깜깜이 대입을 치러야 하는 게 한국 입시의 현주소다.
미국과 일본에도 합격한 경우 등록 의무가 있는 ‘조기 결정(Early Decision)’ 또는 ‘종합형(総合型·총합형) 선발’ 제도가 있다. 하지만 비중이 크지 않은 데다, 한국처럼 수능 몇 점을 받았으니 어디에 진학해야 한다는 생각이 크지 않아 사회적으로 문제가 안 된다. 수시 납치가 K입시 특유의 현상인 이유다.
중앙대가 내놓은 해법은 수능을 잘 본 경우 수시 합격을 취소해 주겠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사흘 만에 교육부가 “수시 합격자는 정시에 지원할 수 없다는 고등교육법 시행령을 어겼다”며 제동을 걸어 없던 일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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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 잘 보는 게 걱정인 상황이 비교육적이란 지적이 이어지자 교육부는 8년 전 수시 정시 통합을 검토했다. 하지만 기본적인 수능과 내신 반영 방식부터 정리되지 않아 논의는 흐지부지됐다. 국가교육위원회에서 최근 다시 수시 정시 통합을 논의 중이지만 자칫 벌집을 건드리는 꼴이 될 수 있어 조심스러운 기색이 역력하다.
한국 입시의 고질적 문제는 각자 합리적으로 내린 선택이 모여 현저히 불합리한 결과를 낳는다는 것이다. 교육부는 공교육을 살리겠다며 수시와 정시를 나눴고, 대학은 우수 학생을 확보하겠다며 수시를 늘리고 전형 시기를 당겼다. 이에 대응하기 위해 수험생이 사교육 업체로 달려가면서 입시는 실력만큼이나 정보력과 눈치에 좌우되는 게임이 됐다. 수시 납치 논란은 이런 왜곡된 입시 현실을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다.
중앙대 설명회에 참석했던 한 고교 입시 교사는 “대학이 수험생에게 시험 잘 볼 걱정 하지 말라고 하는 걸 보고 어처구니가 없었다”고 했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부조리한 현실을 방치하는 교육 당국에 있다. 수시 합격 후 정시 지원을 허용하든, 수시 지원 시기를 바꾸든, 아예 수시와 정시를 통합하든 이제 답을 낼 때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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