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년된 민법에 갇힌 디지털유언장] 구시대적 형식 요건에 갇힌 민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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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대 오정숙(가명) 씨는 오랜 기간 투병 끝에 2023년 사망했다. 그는 자신을 간병한 딸에게 전 재산인 아파트를 남긴다는 취지로 유언장을 정성껏 작성해 날인을 마쳤다. 그러나 이 유언장은 효력을 인정받지 못했다. 오 씨는 말년에 노인복지관에서 배운 문서 작성 프로그램을 활용해 유언장을 ‘한글’ 파일로 작성한 뒤 인적사항만 손으로 썼는데, 민법상 자필 유언장은 모든 내용을 수기(手記)로 써야 하기 때문이다. 오 씨의 딸은 최근까지도 유산을 두고 다른 유족 2명과 소송을 이어 가고 있다.
60대 이상 고령층 자산 ‘시니어 머니’가 지난해 기준 4600조 원이 넘으며 부의 이전 규모는 커졌지만, 유언장 관련 법령은 68년 전 기준에 멈춘 것으로 나타났다. 현행 민법상 자필 유언장이 효력을 인정받으려면 본문뿐 아니라 수십 건에 달하는 재산 목록까지 전부 수기로 작성해야 한다. 이는 1958년 민법 제정 이후 한 차례도 개정되지 않았다. 정작 유언장을 작성해도 구시대적인 형식 요건에 가로막혀 아무 효력이 없는 종잇조각으로 전락해 소송을 야기하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디지털 유언장’을 도입한 선진국처럼 유언장 작성 체계를 시대에 맞게 손봐야 한다고 지적한다. 일본 정부는 이달 초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앱)으로 작성한 유언장도 효력을 인정하고 이를 공적 클라우드에 보관해 주는 내용의 민법 개정안을 확정해 국회 제출을 앞두고 있다. 소순무 유언법제변호사모임 회장은 “유족 간 분쟁을 예방하려면 구시대적인 법을 개편해 보다 간편하게 유언을 남길 수 있는 문화와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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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장의 나라’ 日도 디지털 유언장 추진… IT 강국 韓은 자필 고집
韓 유언장 전체 자필로 써야 인정… 공정증서 작성은 수수료 수백만원
日은 컴퓨터-폰 작성 허용 입법나서… 美도 유언장 작성 플랫폼 합법화
전문가 “전자 작성 인정-공적 보관을”
PC로 작성해 출력했다는 이유로 유언장의 효력이 인정되지 않은 오 씨의 사례는 디지털이 ‘뉴 노멀’을 넘어 일상이 된 21세기 ‘정보기술(IT) 강국’ 한국에서 법이 현실을 따라가지 못한 대표적 괴리로 꼽힌다. 설령 법적으로 완결된 유언장을 작성해도 유족 일부의 반대만으로 그 집행이 사실상 정지되는 병목 현상도 부지기수다. 고인의 뜻이 낡은 법조문에 가로막히는 사태가 속출하는 것이다.日은 컴퓨터-폰 작성 허용 입법나서… 美도 유언장 작성 플랫폼 합법화
전문가 “전자 작성 인정-공적 보관을”
● 21개 재산 목록 PC로 작성했다며 ‘무효’
현행 민법은 유언의 방식을 자필 유언장과 녹음, 공정증서 등 5가지로 제한한다. 이 중 접근성이 가장 높은 자필 유언장의 경우 모든 내용을 유언자가 직접 손으로 써야 효력이 인정된다. 타인에 의한 위조나 변조를 방지한다는 취지에서다. 이는 1958년 민법 제정 이후 68년간 한 번도 개정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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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인에서 이의가 제기되면 등기소는 단독 상속 등기를 반려한다. 금융권은 예금을 ‘분쟁 자산’으로 분류해 상속인 전원의 동의 없이는 출금을 차단한다. 결국 유족은 적법한 유언장을 들고도 다시 소송을 치르게 됐다.
현재 국내에서 이런 허점을 피하려면 공증인과 함께 유언을 작성하는 ‘공정증서 유언’을 선택해야 한다. 법적 전문가를 대동한 채 유언장을 확인하기 때문에 무효가 될 가능성이 작고 법원의 검인 절차가 필요 없다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증인 2명이 필요하고 수백만 원에 이르는 수수료가 발생해 장벽이 높다.
● 日 ‘디지털 유언장’, 美 ‘데스 테크’ 합법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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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속 전문 이양원 변호사는 “일일이 작성하기 힘든 재산 목록의 경우 자필로 작성하지 않더라도 유효성을 인정받을 수 있도록 민법을 부분 개정하고, 디지털 유언장 도입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소순무 유언법제변호사모임 회장은 “작성한 유언장을 생전에 국가기관의 확인을 거쳐 보관할 수 있는 제도를 도입하면 사후 유족들의 반대로 유언장 절차가 지연되는 것을 막을 수 있을 것”이라고 제언했다.
전남혁 기자 forward@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