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근형 파리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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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에 빠진 한국 보수가 미국보다는 유럽 보수 정당의 흥망성쇠에 조금 더 관심을 가졌으면 하는 바람이 들 때가 많다. 프랑스 등 유럽 주요국 전통 보수의 몰락 과정에서 국민의힘이 반면교사로 삼을 만한 착점들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위기에 빠져든 원인부터 양상, 그리고 전향적인 자세로 대처하지 않았을 때의 참혹한 결과까지…. 유럽 보수 정당이 이미 겪은 수난들은 국민의힘의 현재와 상당히 닮아 있다.
프랑스 전통 보수의 뿌리인 드골주의의 명맥을 이어온 공화당(LR)은 10여 년 전부터 중도(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 세력)와 극우(국민전선)에 핵심 지지층을 빼앗기며 ‘존재론적 위기’에 빠져든 지 오래다. 중도와 극우 사이에서 끌려다니다 샌드위치 군소정당으로 전락했다. 샤를 드골 전 대통령부터, 조르주 퐁피두, 자크 시라크까지 프랑스 거리 곳곳에 이름을 남긴 화려했던 보수 대통령의 시대와는 무척 대조적인 상황이다.
군소정당 전락한 佛 전통 보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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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년 대선에서도 상황은 크게 달라질 것 같지 않다. 브뤼노 르타요 대선 후보를 조기에 선출했지만 극우, 중도 마크롱 계열, 좌파 연합에 밀려 4위권으로 처져 있다. 르몽드 등 프랑스 언론들은 “공화당은 캐스팅보트 역할조차 수행하기 어려운 처지”, “정당 기능 상실 단계로 가고 있다”와 같은 평가까지 내리고 있다.
프랑스 우파는 어쩌다 이 지경에 이르렀나. 극우와 제대로 선을 긋지도, 차별화된 노선을 제시하지도 못한 모호함이 가장 큰 원인으로 지목된다. 스스로 공간을 축소하며 온건 보수층은 중도로, 강경 보수층은 극우로 이동하는 ‘이중 지지층 이탈’을 허용했다.
獨 기민당, 극우 배제 및 좌파와 연정해 집권
반면 독일 집권세력의 한 축인 전통 보수 기독민주당은 국민의힘이 연구 대상으로 삼아 볼 가치가 충분한 정당이다. 기민당은 트럼프주의 광풍과 극우 세력의 득세 속에서도 극우와 연대하지 않는다는 ‘방화벽 원칙’을 고수해 살아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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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우 광풍 후 유럽 보수 정당들이 겪은 정체성의 위기는 한국 보수의 현재이자 미래다. 강경 지지층과 중도 확장 사이에 명확한 전략과 비전을 제시하지 못한다면 양쪽 다 잃는 최악의 상황에 빠질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프랑스 공화당처럼 사라져갈 것인가, 독일 기민당처럼 덧셈 정치로 부활할 것인가. 한국 보수 세력의 고민, 또 선택의 시간은 이미 시작됐다.
유근형 파리 특파원 noel@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