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2기가 불붙인 ‘다극화’ 담론 책임 팽개친 초강대국 美의 핑계와 세력권 노리는 中-러 열망의 ‘합작’ 폭주-결탁 속 韓 ‘고단한 동맹살이’
이철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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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코 루비오 미국 국무장관은 한때 임시라던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을 벌써 1년 가까이 겸직하고 있다. 50여 년 전 두 자리를 동시에 맡아 세계를 경략하던 헨리 키신저의 위상에 버금간다는 얘기도 나오지만 실상은 허울뿐이었다. 국무부도 국가안보회의(NSC)도 조직이 대폭 축소된 데다 굵직한 외교협상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오랜 친구와 맏사위가 도맡아 처리하고 있다. 최근엔 이란과의 종전 협상 수석대표마저 J D 밴스 부통령에게 주어졌다.
그러다 보니 루비오의 주 임무는 트럼프의 뒤를 지키는 병풍 역할에 가깝다. 트럼프의 백악관에서 ‘궁정 신하’로 살기란 그야말로 고단함의 연속이다. 주말마다 트럼프의 마러라고 리조트로 향하는 에어포스원 기내에서도 루비오는 시도 때도 없는 보스의 호출을 피하려고 담요를 푹 뒤집어쓰고 잠든 직원인 척 연기하기도 한다.
루비오는 사실 그 기질도 생각도 트럼프와는 전혀 맞지 않는다. 과거 트럼프를 ‘사기꾼’이라며 격하게 비판했던 그에게 지금 자리는 차기 또는 차차기 대권을 위한 징검다리에 불과할지 모른다. 루비오는 대외정책에서도 전통적 패권론자지만 소신보다 순응을 택했다. 그러니 마가(MAGA) 진영은 그를 ‘매파 네오콘’이라고 견제하고, 반대편에선 그의 카멜레온 같은 변신을 두고 “마가의 여장 남자(drag queen)가 됐다”고 조롱한다. 이번 대이란 전쟁에 대해서도 ‘달성 불가능한 목표들’을 지적하면서도 반대하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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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다극화 논리는 일찍이 냉전이 종식된 지 얼마 안 된 1990년대 후반부터 중국과 러시아가 내놓은 전략적 슬로건이었다. 미국의 패권 질서를 견제하면서 자신들도 나름의 세력권을 보장받겠다는 열망이 짙게 담긴 전략적 프로젝트였다. 다만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이라크전쟁의 늪에 빠지면서 그 위상이 예전만 못해지자 서방 학계에서도 10여 년 전부터 단극체제의 종언을 기정사실화하며 양극 또는 다극체제로 접어들었다는 분석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이 벌써 4년을 넘기고 미국의 대이란 전쟁이 발발한 지금, 이제 세계가 다극화 시대로 본격 진입했다는 주장이 다시 봇물을 이루고 있다. 특히 호기롭게 전쟁을 시작하고도 그 출구 찾기에 급급한 미국 파워의 한계, 나아가 미국이 지난 80년간 이끌어온 규칙 기반의 국제질서를 무시하고 동맹 체제마저 흔들어대는 트럼프의 폭주를 지켜보면서 이제 다극체제를 더는 전망이 아닌 현실로 받아들이는 기류도 적지 않다.
하지만 과연 미국 주도의 단극체제는 무너졌는가. 미국이 과거의 힘과는 비할 바 없이 쇠퇴한 게 사실이지만 그 독보적 지위는 여전하다. 경제력에선 중국의 추격이 만만찮다지만 막강 군사력과 달러 패권 등 종합 국력 지수는 중국보다 훨씬 위에, 나머지 나라들에 비해선 까마득히 위에 있다. 학자들도 ‘불완전한(partial) 단극’ ‘불균형한(unbalanced) 양극’ ‘기울어진(lopsided) 다극’ 같은 다양한 형용사를 동원하며 새 체제로의 전환을 단정하진 않는다.
그럼에도 진정 우려스러운 대목은 갈수록 거칠어지는 패권의 약탈적 행태와 그에 따라 급속하게 무너지는 동맹 체제다. 미국도 중-러도 다극체제의 안정과 협력을 내세우지만 그건 허상일 뿐 그 불안정성과 분쟁 가능성이 어느 체제보다 크다고 학자들은 지적한다. 강대국들이 서로의 세력권을 인정하며 한통속이 될 순 있으나 역사적으로 다수 강대국 간엔 동맹 관리가 더 복잡해지고 상대 의도를 오판할 가능성도 높아 쉽게 전쟁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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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