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 걱정 직장인 필독 레시피] 판교 떠나 공주 한옥 주인 된 은퇴 부부 충남 공주에서 제2의 삶 찾아… 서울 떠나니 임대 수익까지 생겨 이주민 커뮤니티가 실질적 도움… 영국 대사 초청해 공주 멋 알려 여유로운 노후에 취미 생활 만끽… 내려놓는 결기가 삶 풍성하게 해
한옥 게스트하우스 ‘반죽동 그곳’도 시간의 켜가 앉은 골목에 은근히 자리 잡은 신축 건물이다. 자갈이 깔린 앞마당과 마루는 적당히 비어 있고 편안하다.
연고도 없는 공주에 정착해 5년째 살고 있는 신철동(67)·전미경희(66) 부부가 이 도시에 이끌린 것도 바로 이 편안함 때문이었다. “공주에 와 보니 어렸을 때 살던 골목 모습이 딱 있는 거예요. 오랫동안 사람들이 살아온 동네라 생활에 필요한 것들이 걸어갈 수 있는 거리에 다 갖춰져 있고 도시는 낡았지만 이야깃거리가 풍부해 매력적이라고 생각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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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공주의 한옥 게스트하우스 ‘반죽동 그곳’ 앞마당에 선 신철동·전미경희 부부. 이들은 경기 성남시 판교의 집을 팔아 공주에 한옥 게스트하우스 등 4채를 마련했고, 여기서 나오는 사업소득과 임대소득으로 여유로운 노년을 즐기고 있다. 채널A X-스페이스팀
그런 두 사람이 충남 공주에 정착하게 된 건 1박 2일 여행 덕분이었다. 6년 전, 부부는 은퇴 후 지낼 조용한 곳을 찾아 2년째 수도권 일대를 물색하고 있었다. 경기 성남시 판교의 단독주택을 팔고 양평·수원·이천·여주 어딘가에 자리를 잡을 생각이었지만 좀처럼 마음에 드는 곳이 없었다.
그러던 중 우연히 공주의 한옥 게스트하우스 ‘봉황재’에서 하룻밤을 묵게 됐다. 이튿날 봉황재 운영자인 권오상 씨의 안내로 마을 투어에 나섰다. 권 씨는 공주에 대해 ‘오랜 역사와 풍부한 이야기를 품고 있는 영국의 바스(Bath)와 같은 도시’라고 소개했다. 공주는 백제의 수도였고 조선 시대엔 충남 지역 감영이 있던 곳이며 조선 말기엔 동학농민운동의 현장이었다. 서로 다른 시대 사람들의 흔적이 한 도시 안에 공존하는 흔치 않은 장소다.
권 씨는 한발 더 나아가 실질적인 정보도 귀띔해줬다. 공주에 도시재생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으며 공주는 국가유산청이 지정한 ‘고도지정지구’로, 이곳에서 한옥을 지으면 정부 지원금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 자신도 수도권 생활을 접고 공주에 내려와 게스트하우스를 연 이주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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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판교 집 한 채가 공주에선 네 채로
처음에 부부는 한옥을 수익 모델로 생각하지 않았다. 3년 반 동안은 직접 그곳에서 살았다. 그러다 옆집 2층 양옥이 매물로 나오자 바로 매입하고 거처를 옮기면서 한옥을 게스트하우스로 전환했다.
첫 손님을 받을 때까지도 큰 기대는 없었다. 2024년 12월 숙박 예약 사이트에 ‘반죽동 그곳’이라는 상호를 올려놓고 제주도로 여행을 떠날 정도였다. 그러다 여행지에서 예약 문의 전화를 받고 부랴부랴 돌아와 첫 손님을 맞았다.
충남 공주시 반죽동의 한옥 게스트하우스 ‘반죽동 그곳’과 카페. 길가에 있는 카페의 옆길을 들어서면 바로 게스트하우스 앞마당이 나온다. 전미경희 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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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나오는 수입도 부부가 살아가기에 충분하다. 게스트하우스를 통해 얻는 사업소득과 카페·소품숍 임대소득을 합치면 두 사람이 한 달을 나기에 모자람이 없고 연금까지 보태지니 노후 생활이 한층 여유로워졌다.
전 씨는 “서울에 살 때는 집 사느라 빌린 대출금을 갚아야 했고 월급은 통장을 스쳐 지나갈 뿐이어서 꼭 하우스 푸어처럼 살았는데 은퇴 후에 오히려 약간의 저축이 가능해졌다”며 “신기한 일”이라고 했다. 자금 여유가 생기면서 부부 모두 취미 생활을 즐기며 여유 있게 지내고 있다. 신 씨는 요즘 어반 스케치에 푹 빠져 있다. 직접 동아리를 꾸려 홍성·서산·아산·당진은 물론 일본까지 스케치 여행을 다닌다.
● 공주의 도움을 받고, 공주에 힘을 보태다
원래 살던 곳을 떠나 연고 없는 낯선 곳에 뿌리를 내리는 일은 누구에게나 쉽지 않다. 귀향했다가 원주민의 텃세에 치여 다시 도시로 돌아왔다는 이야기도 적지 않다. 신 씨는 “어딜 가나 먼저 살던 사람들의 텃세가 없을 수는 없지만 우리는 다행히 공주에 이주민 커뮤니티가 있어 큰 도움을 받았다”고 말했다. 공주의 도시재생 흐름을 읽고 먼저 내려와 정착한 이주민들이 부동산 정보부터 한옥을 잘 짓는 장인 소개까지 발 벗고 나서줬다는 것이다.
부부 역시 이 도시에 보답하고 있다. 전 씨는 영국 대사관 근무 경험을 살려 공주와 영국을 잇는 가교 역할을 한다. 전직 영국 대사가 퇴임할 무렵 그를 게스트하우스로 초청해 공주의 멋을 알렸다. 현직 대사 부부도 이곳에 다녀갔다. 3주간 한국을 여행하던 영국 신혼부부가 마지막 여행지로 공주를 택해 반죽동그곳 게스트하우스를 다시 찾았다는 후기도 있다.
부부는 또 지난해 말 개업 1주년을 맞아 이주민 커뮤니티 구성원 30∼40명을 모아 축하 파티를 열고 가야금 연주자를 초청한 공연도 마련했다. 전 씨는 공주평생교육원에서 성인을 대상으로 영어 그림책 읽기·토론 프로그램도 운영 중이다.
부부를 공주로 이끈 장본인이자 이주민 커뮤니티의 일원인 권오상 씨는 “공주에서만 살아온 원주민들은 오히려 공주의 매력을 모르는 경우가 많다”며 “원주민과 이주민의 융합이 시너지를 내면서 공주 재생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고 말했다.
부부는 친구들에게도 지방살이를 적극 권하지만 실천으로 이어지는 경우는 드물다. 다들 동의는 하지만 실행에 옮기기엔 걸림돌이 너무 많다는 식이다. 전 씨는 “나이 들어 사는 곳을 옮긴다는 게 두렵고 지방으로 내려가는 것은 왠지 뒤처지는 듯한 느낌도 주기 때문이 아닐까”라고 추측한다.
하지만 조금 내려놓고 지방으로 오면 삶에 여유가 생긴다는 게 부부의 공통된 이야기다. 공주에서의 하루하루가 서울에서보다 훨씬 풍성하다고 확신하는 부부는 내려놓는 것이 잃는 게 아니라 오히려 더 많은 것을 얻는 길일 수 있다고 말한다. 필요한 건 거창한 계획이 아니라 우물쭈물하지 않는 결기라고.
글 사진 공주=김현지 기자 nu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