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규인 스포츠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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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사장님이 오시는데 우승 감독과 재계약하지 않으면 모양이 빠지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다른 이유를 못 찾겠다. 이런 이유가 아니라면 챔피언결정전을 엿새 앞둔 시점에 굳이 정규리그 1위 팀이 감독을 내쫓을 필요가 없다. 이 감독이 10년 동안 팀을 이끈 상황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프로배구 여자부 한국도로공사는 지난달 26일 김종민 감독(52)과 재계약하지 않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한국도로공사 본사 신임 사장 공모 절차를 시작한 지 사흘째 되는 날이었다. 한국도로공사는 그러면서 ‘김 감독은 계약 만료일인 31일까지만 팀을 이끌게 됐다’고 덧붙였다. 챔프전 시작(4월 1일) 하루 전날까지만 팀을 지휘하라는 뜻이었다. 챔프전이 일주일도 남지 않은 상황에서 감독을 내쫓으면서 ‘그래도 챔프전 하루 전까지는 팀을 맡아 달라’고 한 팀이 과연 전 세계 프로 스포츠 역사에 한국도로공사 말고 또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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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도로공사가 김 전 감독과 결별하기로 한 건 폭행 및 명예훼손 혐의 때문이다. 같은 팀 코치였던 A 씨는 지난해 4월 이런 혐의로 김 전 감독을 고소했다. 그러자 김 전 감독이 이 주장을 반박하고 나섰다. 검찰은 올해 2월 이 사건에 대해 약식기소 결정을 내렸다. 죄가 있을 수 있어도 정식 재판까지 갈 필요는 없다는 뜻이다. 법원 판단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
헌법 제27조는 ‘형사피고인은 유죄의 판결이 확정될 때까지는 무죄로 추정한다’고 규정한다. 아니, 거창하게 이 ‘무죄 추정의 원칙’까지 거론할 필요도 없다. 구단 프런트 직원 사이에서도 ‘챔프전 때까지는 김 전 감독에게 지휘봉을 맡기는 게 옳다’는 의견이 우세했다. 한국도로공사는 배구팀을 본사 소속 부서가 아니라 산하 사단법인 형태로 운영한다. 그렇다고 새 사장을 맞아야 하는 본사 높으신 분들 ‘입김’을 아주 피해 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김 전 감독이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린다면 재계약 여부를 결정하기가 더욱 복잡할 수밖에 없다. 새 사장이 사인하는 배구단 관련 첫 업무가 감독 경질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당장 우승을 포기하는 한이 있더라도 일단 ‘불씨’를 꺼뜨리고 새 사장이 새 사령탑과 도장을 찍는 쪽으로 ‘정무적 판단’을 내렸을지 모른다. 같은 이유로 새 감독 선임 역시 새 사장 취임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다. 한국도로공사는 김 코치와 ‘감독대행’ 1년 계약을 맺으면서 일단 ‘갓길’에 차를 댔다.
김 코치는 챔프전 3차전 4세트 때 팀이 벼랑 끝에 몰리자 작전 타임을 불러 선수들을 이렇게 독려했다. “책임지고 때려, 책임지고. 준비가 안 됐는데 여기 주면 되냐. 책임지고, 책임지고.” 이 말을 진짜 들었어야 할 사람은 당시 코트 위 선수들이 아니라 한국도로공사 본사 사옥에 있던 누군가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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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규인 스포츠부 차장 kin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