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범 작가·‘저스트고 파리’ 저자
동네 장터는 이런 변화를 가장 먼저 느낄 수 있는 곳이다. 파리의 대부분 동네에는 일주일에 두 번씩 야외 시장인 ‘마르셰’가 열린다. 이른 아침에 가 보면 계절이 바뀌는 찰나가 눈에 보인다. 겨울 동안 주인공이던 투박한 양배추와 흙 묻은 뿌리채소 사이로 어느 날 갑자기 가느다란 아스파라거스와 연둣빛 어린 채소들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흙이 묻은 당근 같은 채소를 고르며 생산자와 몇 마디를 나누다 보면, 봄은 손끝의 촉감으로 먼저 다가온다.
프랑스 봄 식탁의 첫 번째 주인공은 단연 ‘식탁 위의 귀족’ 아스파라거스다. 시장에는 굵고 부드러운 화이트 아스파라거스와 아삭한 그린 아스파라거스가 나란히 놓인다. 셰프들은 이를 갈색이 날 때까지 녹인 버터인 ‘부르 누아제트’에 살짝 익히거나, 달걀노른자의 고소함이 응축된 홀랜다이즈 소스를 곁들여 재료 본연의 우아한 풍미를 극대화한다. 특히 쓴맛이 덜하고 질감이 부드러워 버터, 달걀, 크림과 환상적인 궁합을 이루는 화이트 아스파라거스는 파리의 식탁을 싱그럽게 수놓는 일등 공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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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의 정점을 찍는 메인 요리의 재료는 단연 양고기다. 프랑스에서 봄은 ‘어린 양고기의 계절’이기도 하다. 겨우내 어미의 젖만 먹고 자란 ‘아뇨 드 레(Agneau de lait·젖먹이 양)’는 이 시기에만 맛볼 수 있는 귀한 식재료다. 육질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연하고 잡내가 없어, 셰프들은 강한 양념 대신 가벼운 쥬(jus·육즙 소스)와 타임, 로즈메리 같은 신선한 허브만을 곁들인다. 여기에 갓 수확한 어린 완두콩과 햇감자를 곁들인 양고기 스테이크는 프랑스 주방이 선사하는 가장 완벽한 봄의 성찬이다.
피날레 디저트로는 딸기를 빼놓을 수 없다. 셰프들이 가장 먼저 찾는 품종은 프랑스 남부의 가리게트다. 길쭉한 모양에 상큼한 산미와 깊은 향의 균형이 뛰어나, 타르트나 샹티이 크림과 함께 딸기 자체의 야생미를 살리는 방식으로 쓰인다.
프랑스 요리는 흔히 화려한 소스와 기술로 기억되지만, 사실 그 중심에는 언제나 정직한 계절이 있다. 파리의 레스토랑들이 봄을 맞이하는 방식도 마찬가지다. 화려한 기교를 뽐내기보다는 긴 겨울을 견뎌낸 대지가 건네는 선물을 경외심을 담아 접시에 옮기는 일. 결국 프랑스 레스토랑을 빛나게 하는 것은 셰프의 손끝이 아닌, 자연이 매년 어김없이 건네는 약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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