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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의 일[박연준의 토요일은 시가 좋아]〈32〉

입력 | 2026-03-06 23:06:00


다음이라는 것이 있을까?

(중략)

말하지 않는 것들을 보살피며
무성한 기쁨을 키워낼 것

음식에 어울리는 접시를 고른다
포크로 파스타를 말아서
접시에 조심스럽게 옮겨놓는다
방울토마토를 반으로 잘라서
파스타 위에 얹는다

신문지를 펼쳐놓고 깨진 화분을 하나하나 옮긴다
의자에 앉아 선물 받은 베고니아가 시들어 있는 것을 본다
잎 가장자리가 누렇게 말려 들어가 있는 것을 본다
방충망을 떼어내어
샤워기 호스를 붙잡고
벌레의 사체를 배수구로 흘려보낸다

다음, 그 다음에도


―여세실(1997∼ )





몸이 무거우면 생활이 무거워지고 정신이 어수선하면 집이 엉망이 된다. 벌써 몇 달째 책으로 뒤덮인 책상을 좀 치워야지 생각만 하고 있다. 다음에! 마음은 쉽게 ‘다음’을 기약한다.

“다음이라는 것이 있을까?” 시의 첫 줄에 뜨끔하다. ‘다음’이란 차례의 바로 뒤일 수도, 어떤 기회일 수도 있다. 화자는 ‘기회’를 얻는 건 요원하다고 생각하는지, 소소한 일들을 찾아내 순차적으로 하고 있다. 깨진 화분을 정리하고 때 묻은 방충망을 떼어내 물로 씻어낸다. 파스타를 만들고 접시를 골라 음식을 정성껏 담아 먹는다. 시든 식물을 살피고 벌레 사체는 배수구로 흘려보낸다. “말하지 않는 것들을 보살피며/무성한 기쁨을 키워낼 것”, 시는 여기에 삶의 비밀이 있음을 알려준다.

시를 읽으니 집 안 곳곳의 먼지를 털어내고 아무렇게나 쌓아둔 책들을 정리하고 싶어졌다. 냉장고를 정리해 단정한 음식을 만들어 먹으며 생활을 돌보고 싶어졌다. “말하지 않는 것들”을 보살피는 일이야말로 삶의 “다음” 장면을 만들어내는 일 아닐까. 어쩌면 ‘다음’은 ‘지금’만이 만들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박연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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