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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광장/박원호]‘팍스 아메리카나’의 붕괴

입력 | 2026-03-02 23:12:00

가치 아닌 ‘home’ 앞세우는 트럼프의 미국
80년 지속된 집단안보-자유무역 동시 위기
레드라인 사라지며 만국의 만국 투쟁 열려
어두운 터널 앞 공동이익-가치부터 찾아야



박원호 객원논설위원·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미국 부통령 J D 밴스는 2024년 공화당 부통령 후보직 수락 연설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사람들은 추상적 가치를 위해 싸우지 않고 고향(home)을 위해 싸운다”고.

여기서 ‘추상적 가치’라 함은 아마 민주주의, 평화, 인류애, 공존 등이 포함될 것이며, ‘고향’은 가족과 이웃이 있는 미국 본토를 말할 것이다. 일견 상식적으로 들릴지 모르겠으나, 이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80년 동안 세계 질서를 유지했던 ‘팍스 아메리카나’의 붕괴를 선언하는 말이기도 했다. 이 관점에 의하면 미국이 2월 28일(현지 시간) 이란을 폭격한 것이나, 올 1월 베네수엘라를 침공한 것 또한 자국의 안보를 위한 것일 따름이다.

사실 이런 구조적인 변화의 시작은 아무도 알아채지 못했다. 단지 도널드 트럼프라는 매우 독특한 사업가가 미 대선에 무모하게 도전해 거짓말처럼 당선됐던 ‘사건’이 불과 10년 전의 일이었다. 누구나 트럼프가 실패하고 ‘질서’가 다시 돌아올 것이라 생각했다. 트럼프 1기 행정부의 국가안보보좌관이었던 존 볼턴조차도 막무가내 트럼프를 통제하기 위한 ‘어른들’의 역할이 필요하다고 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2024년 재집권에 성공한 뒤 2년 차에 접어든 트럼프를 이제 ‘우발적 사건’이라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트럼프를 사랑하건 증오하건 그가 미국 정치를 넘어 세계 정치 지형에, 나아가 한국 정치에 심각한 영향을 미쳤고 미래에도 매우 깊은 상흔을 남길 것이라는 점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또한 그가 무대에서 사라진 다음에도 제2, 제3의 트럼프가 나타날 것이라는 점은 주지의 사실이다.

현상적으로 가장 큰 변화는 이란 폭격에서 봤듯 더 이상 미 행정부가 유엔이나 동맹, 심지어 자국 의회를 거치지 않고도 전쟁을 개시할 수 있게 됐다는 사실이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렇게 전쟁을 시작한 것을 전 세계가 당연하게 받아들이도록 만들었다는 점이다. 베네수엘라 침공과 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 체포, 그리고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동맹국인 덴마크 영토 그린란드에 대한 터무니없는 영유권 주장 등이 우리를 이미 둔감하게 만든 것인지도 모른다. 적어도 이란은 폭압적이고 자국민을 학살한 신정국가가 아니었던가. 그러나 한 번만 되새겨 보면, 압도적인 군사력을 지닌 미국이 어디로 튈지 막을 수 있는 레드라인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된다. 마치 미 상선 제너럴셔먼호가 1866년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오던 때처럼 말이다.

국제사회를 이끄는 규범이 사라진 곳에서 우리는 새삼 제2차 세계대전 이후 80년간 이어진 팍스 아메리카나의 와해를 목도하고 있다. 그것이 그간 유지될 수 있었던 비결은 유엔과 나토를 중심으로 한 집단안보가 자유무역을 보장하고, 그것이 국제 정치를 만국의 만국에 대한 투쟁 대신 상호 번영으로 이끄는 길이라는 공감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그런 의미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관세를 주요 의제로 삼는 것도 우연이 아니다. 국제 질서를 지탱하던 두 개의 다리, 집단안보와 자유무역이 이토록 짧은 시간에 동시에 붕괴하리라 생각한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으리라.

인간의 이성이 민주주의적 제도와 규범을 통해 조화로운 세계 질서, 곧 평화에 이르게 할 수 있다는 이상은 매우 나이브하게 들릴 수 있겠지만, 뿌리 깊은 연원을 지니고 있다. 대의민주주의가 잘 작동하는 곳에서 세금, 징병, 사망 등으로 전쟁 비용을 직접 부담할 시민들이 평화를 선호할 것이라는 칸트의 지적이 그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지난 80년 동안 숱한 나라들의 민주화 과정은 적어도 명목적으로는 세계 평화가 확산되는 과정이기도 했다. 이제는 이런 ‘고상한 가치’를 더 이상 믿는 사람은 없어 보인다. 어차피 민주주의가 미국을 포함해 퇴조의 과정에 있지 않은가.

“가치가 아닌 고향을 위해 싸운다”는 말에서 나는 니힐리즘과 종족주의를 읽는다. 평화, 번영, 공존, 민주주의, 심지어 진리 등의 보편적 가치는 너무나 허무하며, 중요한 것은 내 손톱에 박힌 가시가 주는 불편함이라는 인식이다. 세계 질서를 위한 리더십을 미국이 회복하는 데에는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이다.

우리 앞에는 그래서 만국의 이기주의와 종족주의로 가득한 어두운 터널이 있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팍스 아메리카나가 만들어 낸 질서는 미국의 선의만이 아니라 그 질서에서 같은 이해를 가졌던 수많은 국가와 시민들이 그것을 지키려 했기에 유지될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 질서가 흔들린다면, 다시 이를 복원하거나 새 질서를 만드는 일 역시 거대한 외부의 리더십을 넘어 새로운 보편적 가치와 관계가 무엇인지를 찾아 나가는 일이어야 하지 않을까.



박원호 객원논설위원·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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