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파고 쇼크 10년, AI와 인간 공존 실험] 〈上〉 AI 공포 가장 먼저 덮친 바둑계 GPU 채워진 기원서 ‘AI끼리 둔 기보’ 공부… AI로 창의성 자극 “예전보다 포석 다양해져” “판 전체 보는 인간의 ‘통찰력’은 대체 불가”… AI發 산업파괴 기로 속 바둑이 공존법 제시
26일 오후 서울 서초구 신세계백화점 강남점 팝업스토어에서 청소년이 인공지능(AI) 바둑로봇 ‘센스로봇 고’와 대국을 펼치고 있다. 2016년 ‘알파고 쇼크’ 이전에는 선배 기사들의 기보를 보고, 스승과 함께 공부했지만 이제는 AI를 이용한 공부법이 대세가 됐다. 바둑 애호가부터 기사들까지 AI를 파트너 삼아, AI를 넘어설 방법을 연구하는 셈이다. 양회성 기자 yohan@donga.com
이제 AI는 바둑을 넘어 ‘사고력’을 탑재하고 인간의 일자리를 위협하고 있다.
지난해 미국에서 사라진 일자리만 95만 개가 넘는다는 통계도 나왔다. AI가 조만간 인간을 대체할 것이란 공포를 먼저 맞닥뜨린 바둑계는 어떻게 이 파고를 넘어 AI와 인간의 공존을 모색했는지 들여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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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 초 찾은 서울 성동구 한국기원. 80년 한국 바둑 역사를 이끌어온 이곳 연구생들이 컴퓨터 앞 바둑 화면을 주시하고 있었다. 과거 조훈현, 이창호 등 바둑계 전설들의 기보와 바둑 정석 책들로 가득 차 있던 책장은 사라졌다. 그 자리는 한 장에 500만∼700만 원에 판매되는 엔비디아의 최상위 게임용 그래픽처리장치(GPU) ‘지포스 5090’이 자리 잡았다.
현장에서 만난 바둑 국가대표팀 코치 진시영 9단은 10년 전 3월 이후 바둑계 풍경이 180도 달라졌다고 했다. 그는 “지금은 인공지능(AI)끼리 둔 기보를 주로 본다”며 “사람이 둔 기보보다 훨씬 퀄리티(품질)가 높기 때문”이라고 했다.
2016년 3월 ‘알파고’와 이세돌 9단의 대국으로 AI가 바둑 1인자의 능력을 넘어설 수 있음이 증명되면서 세계는 처음으로 AI의 파괴적 위력을 체험했다. 직격탄을 맞은 바둑계의 충격은 더 컸다. 바둑 기사의 권위가 추락하고, 결국 바둑이 사라질 수 있다는 우려도 나왔다. 최근 AI가 사무직 일자리를 파괴하고 실업률을 10%까지 끌어올릴 것이란 전망이 나오며 AI의 ‘파괴적 혁신’ 공포가 커진 것과 비슷하다.
● AI 쇼크 먼저 맞은 바둑계 “AI가 창의성 자극”
AI 쇼크를 미리 겪은 바둑계는 ‘AI와의 공존’으로 방향을 틀었다. ‘스승’의 발자취보다 AI가 추천하는 ‘블루스폿’(승률이 가장 높은 수)을 이해하고, AI처럼 바둑을 둘 수 있는 기사들은 살아남은 것이다. 한국바둑협회에 따르면 2015년 약 920만 명으로 추산됐던 바둑 인구(바둑을 둘 줄 아는 인구)도 2023년 기준 883만 명으로 약 4% 줄어드는 데 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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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18번째로 통산 1000승을 기록한 김지석 9단은 “AI는 훨씬 다양한 수법을 제시하기 때문에 포석 자체는 예전보다 더 다채로워졌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다만 특정 AI 모델 의존도가 너무 커졌다는 지적도 나온다. 자체 모델 ‘줴이(절예·絶藝)’가 있는 중국과 달리 한국은 미국이 개발해 오픈소스로 공개한 바둑 AI ‘카타고’를 활용해 훈련한다. 홍민표 바둑 국가대표팀 감독(9단)은 “카타고가 더 이상 업데이트되지 않거나 문제가 생기면 기사들을 양성하기 쉽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 “AI 탓 실업률 10%”… 일자리 위협은 더 커져
AI 쇼크를 먼저 겪은 바둑계는 가까스로 생존하며 진화 중이지만 다른 업종은 AI발 ‘파괴 쇼크’의 기로에 서 있는 상태다. 최근 미국 시트리니 리서치가 “2028년 실업률이 10%에 달할 것”이라며 AI의 일자리 파괴가 경제 위기를 초래할 것이란 보고서를 내 뉴욕증시가 급락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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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2023년 국제머신러닝학회에서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 연구진이 발표한 논문에 따르면 카타고가 자신이 높은 확률로 이기고 있다고 착각하도록 유도하자 인간이 90% 이상의 승률로 승리를 거뒀다. 아마추어 바둑인이라면 누구나 ‘큰 그림’을 보고 카타고가 위험에 처했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는 수준이었다. MIT 연구진은 “판 전체에서의 구조적 결함을 보는 인간의 ‘통찰력’을 대신할 수 없었다”고 밝혔다.
최지원 기자 jwchoi@donga.com
박종민 기자 blick@donga.com
전혜진 기자 sunris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