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대 초보 유튜버’ 이용만 전 재무부 장관
지난해 5월 유튜브를 시작한 이용만 전 재무부 장관이 서울 강남구 대치동 사무실에서 경제개발 5개년 계획 등 한국 경제 개발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박형기 기자 oneshot@donga.com
광고 로드중
《“이용만입니다. ‘이용만’ 해주세요.” 올해 93세인 이용만 전 재무부 장관은 지난해 5월 유튜버로 나섰다. “기록이라도 남기자”는 아들의 권유와 군대 간 손자에게 옛 얘기를 들려주자는 마음으로 시작한 유튜브의 구독자가 벌써 4만4000명을 넘었다. 식당 등에서 인사하거나 사진을 같이 찍자는 학생 군인 등 젊은 구독자도 제법 생겼다. 이 덕분에 76년 만에 고향 친구도 만나고, 모교인 고려대 교정에서 까마득한 후배들과 유쾌한 얘기도 나눴다. ‘90대 초보 유튜버’ 이 전 장관을 서울 강남구 대치동 사무실에서 만났다.》
● “유튜브 출연? 알려주면 재미없잖아”
이 전 장관은 얼마 전 89세 정영의 전 재무부 장관, 80세가 된 윤증현 전 기획재정부 장관을 ‘밥이나 먹자’며 불러내 방송을 진행했다.
광고 로드중
세 전직 장관들은 과거 재무부에서 밤샘 근무하던 일, 정부 부처 사격대회에서 국방부와 중앙정보부를 제치고 1등을 차지한 무용담 등을 쏟아냈다. 하지만 요즘 정책에 대해 말을 아꼈다. 이 전 장관은 “알아서 잘할 것”이라고 했다. 그가 재무부 장관으로 일할 때 수행비서가 구윤철 사무관(현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이다.
이 전 장관은 5·16 이듬해인 1962년 내각기획통제관실에서 공직에 입문했다. 1962년 시작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심사·분석하고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에 보고하는 일을 맡았다. 나중에 청와대 파견을 가서도 그 일을 계속했다.
● “1차 개발 땐 빈주먹으로 암중모색”
“1차 때가 가장 어려웠어요. 경제개발을 어떻게 하는지 아무도 몰랐어요. 그저 빈주먹으로 암중모색한 겁니다.”
광고 로드중
고려대 행정학과 55학번인 이 전 장관이 고려대 교정에서 재학생들과 함께 촬영한 유튜브 영상.
경제개발 초기에도 요즘처럼 시중 자금이 기업 등으로 흐르도록 유도하는 ‘생산적 금융’이 중요했다. 하지만 사채 이자가 연 40%가 넘던 때여서 낮은 금리의 은행에 저축이 들어오지 않았다. 정부는 1965년 9월 30일 금리 현실화 조치를 단행하고 은행 예금 최고금리를 연 30%로 올렸다. 기업 대출 금리는 최고 연 26%로 제한했다. 은행이 손해를 보며 기업에 돈을 빌려주는 ‘역금리’ 제도를 도입한 것이다.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거예요. 그냥 우리 식으로 한 거야. 그때는 정부가 은행을 소유하고 있었으니까.”
1974년에는 은행 저축예금 증가액으로 국민투자기금을 만들고 연 9%의 낮은 금리로 중화학공업을 지원했다. 금리 차액은 정부가 재정으로 보조했다. 그는 “일본이 전쟁을 일으킨 힘도, 패전 후 경제를 다시 일으킨 힘도 모두 중화학공업에서 나왔다”며 “당시 중화학공업 육성 목표는 방위산업 강화였다”고 했다. ‘K방산’이 그렇게 시작됐다.
광고 로드중
“재무부 직원들이 유럽 등의 성공 사례를 배워서 주택복권을 만들었어요. 정부가 사행 행위를 유도한다고 난리가 났었지.”
이 전 장관은 1967년 재무부 이재2과장으로 부임했다. 그때 만든 게 주택복권이다. 그는 “주택복권 발행액의 60%는 당첨금으로 지급하고 나머지 40%는 군경 유가족 자녀 주택자금으로 연 4%에 빌려 줬다”며 “체납이 거의 없어 주택은행이 아주 탄탄해졌다”고 했다.
1967년 주택기금으로 출발한 주택은행은 주택 건설 및 구입 자금을 지원했다. 30년 뒤 시중은행으로 전환됐다가 2001년 국민은행과 합병됐다.
“당시 주택은행은 땅이 있는 사람한테만 대출해 줬어요. ‘땅이 없으면 집도 못 사느냐’는 비판이 있었는데, 땅도 없는데 집을 어떻게 지어요. 지금처럼 빚만 갖고 사면…. 난 좀 걱정이야.”
그는 “주택자금을 저렇게 많이 빌려주는 건 아주 골치 아픈 일”이라며 “주택은행을 없앤 건 참 잘못한 일”이라고 했다. 국책은행인 주택은행이 주택 마련을 위한 장기 자금을 빌려주고, 상업은행은 단기 자금을 빌려주는 역할 분담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 “주택자금 특단조치 없으면 감당 못 해”
“은행이 금리가 낮다고 돈 빌려주고. 금리 올라가면 다들 죽는다고 하고. 지금 그러고 있어요. 집은 사면 잘 팔지도 못하는데, 이자만 늘고. 그럼 나중에 어떻게 할 거야.”
그는 “일본은 직장 생활 10년 이상 한 사람에게만 주택자금을 빌려줬다”며 “그래야 월급 갖고 주택자금을 상환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고 했다.
“예전에 후배들에게 ‘가계부채, 주택자금에 대해 특단조치를 하지 않으면 앞으로 감당을 못 한다’는 얘길 해준 적이 있어요. 아이디어까지 건네줬는데….”
그는 “정부에서 일할 때 제일 못해 준 게 영세 서민”이라며 “정부가 획기적인 서민 지원책을 강구하면 좋겠다”고 했다.
“나 있는 동안만 넘어가면 된다고 그러면 안 돼요. (돈 빌린 사람) 월급이 2배로 뛰어, 3배로 뛰어? 그러다가 사고 난다고.”
이 전 장관은 “정부가 임대주택을 많이 지어야 한다”며 “신혼부부 등이 월급을 갖고 돈을 모으거나 부채를 갚을 수 있도록 주거 부담을 덜어주는 게 장기적 해결책”이라고 했다.
● “외환위기, 저축은행 사태 아쉬워”
“기업들이 사업을 키우면서 시설을 늘렸는데 돈이 모자라니 사채까지 막 끌어다 썼어요.”
1972년 8월 2일 밤 대통령 긴급명령으로 ‘8·3 사채 동결 조치’가 전격 발표됐다. 그가 재무부 이재국장으로 일할 때였다. 재무부 직원들은 밤샘을 하면서 기업들이 신고한 사채를 정리했다.
“박 전 대통령이 밤 10시에 재무부로 왔습니다. 계산기도 없던 때라서 강경상고를 나온 김정렴 전 대통령비서실장이 기업들이 신고한 금액을 직접 주판으로 집계해서 보고했어요.”
당시 통화량의 80%에 해당하는 3456억 원의 사채가 신고됐다. 1800억 원 정도로 추산했던 금액의 거의 갑절이 들어온 것이다. 정부는 반시장적 조치라는 논란에도 기업이 보유한 연 40∼50% 사채를 연 16.2%로 전환하고 3년 거치 5년 분할 상환하게 했다. 특별자금 2000억 원을 공급해 기업 도산을 막았다. 그는 “사채 동결 조치 이후 1973년 산업 생산 증가율이 2년 전의 두 배로 늘어나고 성장률, 국제수지 적자가 크게 개선됐다”고 했다.
서민 60만 명이 쓰던 연 50, 60%의 고리 사채인 ‘무진’을 없애기 위해 단자회사법 상호금융법, 신용협동조합법 등 ‘사금융 양성화 3법’도 시행됐다. 그는 “나중에 종합금융회사들이 단기로 외국에서 달러를 빌려 장기로 빌려주다가 외환위기를 초래했다”고 했다. 2011년 저축은행 부실로 예금보험공사가 27조 원의 공적자금을 투입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그는 “금융을 취급 안 해본 사람들이 하면 예상치 못한 일들이 많이 생긴다”고 아쉬워했다.
● “부실기업 정리, 가장 골치 아팠던 일”
“수출을 늘려야 한다고 해서 저리로 기업들에 정책자금을 지원했어요. 그랬더니 부실도 함께 커졌습니다.”
그는 재무부에서 일하면서 가장 어려웠던 일로 1972년 사채 동결 조치에 이어 추진한 ‘부실기업 정리’를 꼽았다. 이해관계자가 많았다.
“‘사과 한 박스를 쏟아놓으면 먹을 수 없는 썩은 사과가 나온다. 은행 대출도 그렇다. 빌려준 돈을 다 어떻게 받느냐’고 여기저기 가서 설득했어요.”
그는 “청와대, 감사원까지 가서 부실기업 정리 필요성을 설명했다”고 말했다. 상공부 건설부 교통부 등 전 경제부처와 한국은행, 산업은행을 참여시켜 힘들게 부실기업 정리안을 마련했다.
“김재규 전 건설부 장관이 중동 진출 기업 구명을 위해 직접 찾아온 적도 있었어요. 국가에서 꼭 지원해야 할 기업이면 정부 예비비로 쓰라고 했더니 ‘그걸 몰라서 여기까지 왔겠느냐’며 화를 내고 갔어요.”
그는 “김 전 장관이 나중에 박 전 대통령을 쏜 그 중앙정보부장이 될 줄은 몰랐다”고 했다.
● “재무부, 성장과 안정 놓고 밤낮을 싸워”
그는 1980년 재무부를 나와 중앙투자금융 사장, 신한은행장, 외환은행장을 거쳐 은행감독원장으로 일했다. 1991년 재무부 장관으로 11년 만에 재무부에 복귀했다. 그는 “재무부는 성장과 안정, 국제수지라는 세 마리 토끼를 한 번에 잡는 일을 해야 했다”며 “성장을 하려면 돈을 써야 하고 안정을 시키려면 돈을 안 써야 하기 때문에 그걸 갖고 밤낮을 싸웠다”고 했다.
1933년 강원 평강군에서 태어난 이 전 장관의 본명은 이승만이다.
“이북에서 ‘이승만, 김구 타도하자’고 매일 외쳤어요. 중학교 들어갈 때 아버지가 이름을 바꾸자고 해서 용만이 된 겁니다.”
6·25전쟁이 터지고 홀로 월남한 그는 입대해 1951년 춘천 전투에서 어깨와 허리에 총상을 입었다. 그때 다친 왼쪽 어깨는 지금도 처져 있다. 척추에 박힌 총알은 아직도 남아 있다.
“부모가 나무를 심으면 자식들이 그 덕을 봅니다. 한미동맹이 그렇습니다.”
그는 “이승만 대통령이 휴전협정에 동의하는 대신 한미 상호방위조약, 미국의 원조, 한국군 현대화의 3가지 약속을 받아내 산업화의 토대를 닦았다”고 했다.
이용만 전 재무부 장관은△1933년 강원 평강군 출생
△1977∼1980년 재무부 재정차관보
△1985∼1988년 신한은행장
△1988∼1990년 외환은행장
△1990∼1991년 은행감독원장
△1991∼1993년 재무부 장관
박용 논설위원 park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