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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통치’의 상징, 붉은 벽돌 도서관… 그곳에서 자란 박완서의 꿈[염복규의 경성, 서울의 기원]

입력 | 2026-02-18 23:06:00

대한제국 기념터에 총독부도서관… 식민통치 기념차 천황제일에 개관
경성부립도서관도 소공동에 신축… 어린이-부녀열람실, 사회관 갖춰
식민권력을 드러내는 상징물이자… 조선인에게 지식-문화의 장 제공



3·1운동 이후 이른바 문화통치 과정에서 대규모 공공도서관이 세워졌다. 조선총독부도서관이 발간한 잡지 ‘문헌보국(文獻報國)’ 창간호(1935년) 표지에 실린 도서관 정면. 사진 출처 국립중앙도서관


《일제공공도서관의 이중적 성격


전통시대 일반 대중이 아닌 권력자를 위해 당대의 기록과 지식을 모아두는 장소로 출발한 도서관은 근대에 이르러 시민 누구나 접근할 수 있는 열린 공간으로 변화했다. 1895년 출판한 ‘서유견문(西遊見聞)’에서 유길준은 서양의 도서관을 “다양한 책을 보관하고 읽게 하여 세상에 무식한 사람을 없애는 곳”이라고 소개했다.》





염복규 서울시립대 국사학과 교수

일제는 3·1운동 이후 이른바 문화통치를 실시하면서 비로소 대규모 공공도서관 건립을 추진했다. 문제는 재정이었다. 도서관 건립 예산을 확보하지 못한 총독부는 당시 국유였던 남대문로의 광통관(廣通館) 건물(대한제국기 대한천일은행, 현 우리은행 종로금융센터)을 조선상업은행에 불하해주고, 그 대신 기부를 받아 총독부도서관을 건립했다. 장소는 충분한 부지를 확보할 수 있으면서 도심부에 최대한 가까운 서울 중구 소공동 웨스틴조선호텔 부근 대한제국기 석고단 영역으로 정했다. 현재 롯데백화점 본점 자리다. 규모는 지상 3층, 건평 260평 정도로 일반열람실, 부인열람실, 전문가를 위한 특별열람실 등을 갖추고 문화 공연, 학술 강연 등을 할 수 있는 대강당도 계획했다.

총독부도서관은 1925년 4월 3일 정식 개관했다. 공사는 더 일찍 끝났지만 전설상 첫 일본 천황인 진무천황제일(神武天皇祭日)에 맞췄다. 마치 진무천황이 조선에 문명의 시혜를 베푸는 듯한 기념성을 부여한 것이다. 총독부도서관은 조선의 대표 도서관으로, 1930년대 중반 통계를 보면 조선 내 모든 도서관 장서량 합계의 3분의 1 정도를 소장하고 있었다. 따라서 도서관의 기본 기능 외에 도서관사업회를 조직해 각종 강연회, 독서회, 영화회 등을 활발하게 개최했다. 또 지방 도서관에 매월 50권씩 대출해주는 순회문고도 운영했다.

매일신보(1931년 9월 8일)에 실린 조선총독부도서관 열람실 풍경. 사진 출처 국립중앙도서관

총독부도서관에 앞서 1922년 개관한 경성부립도서관도 있다. 명치정 2정목의 옛 한성병원 건물을 이용했다. 현재 주한 중국대사관과 명동성당 사이다. 당시 한성병원은 일본인 중심지의 대표적인 대형병원이었다. 점차 이용자가 늘자 경성부는 1927년 소공동의 대관정(大觀亭) 자리로 도서관을 이전, 신축했다. 대관정은 대한제국기 황실의 영빈관으로 건립한 양식 2층 건물로, 러일전쟁기에는 일본군사령부로 쓰였다. 경성부는 그 일대의 공지에 지상 3층으로 도서관을 신축하고 대관정 건물은 별관으로 활용했다. 도서관은 1, 2층에 일반열람실 외에 각각 어린이열람실과 부녀열람실을 배치했다. 3층은 사회사업을 위한 사회관으로 이용했으며, 옥상에는 정원을 조성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총독부도서관과 경성부립도서관은 모두 소공동 일대 옛 대한제국의 기념 공간으로 모이게 됐다. 큰 시설이 입지할 만한 규모의 국공유 부지가 있는 데다 환구단을 철거하고 조선호텔을 건립한 것처럼 과거의 기념물을 훼손해도 큰 반발이나 껄끄러운 문제가 없었기 때문이다.

1927년 서울 중구 소공동에 신축한 경성부립도서관. 사진 출처 국립중앙도서관

경성부립도서관은 본관 외에 종로분관을 운영했다. 종로분관의 연혁은 1908년 일본인 상업회의소 서기장 야마구치 세이(山口精)가 남미창정(南米倉町·현 서울 중구 남창동)에 세운 사립 경성도서관에서 시작한다. 이 도서관은 1919년 운영난으로 폐관하면서 장서는 서울 종로구 가회동 취운정(翠雲亭)의 같은 이름을 가진 경성도서관으로 인계됐다.

취운정은 여흥 민씨 세력의 중심 인물인 민태호가 19세기 중반 세운 정자로 알려져 있다. 병합 이후 북촌 옛 양반 상류층의 사교 공간으로 이용되다가 1920년 김윤식 윤익선 등이 이곳에 도서관을 개관했다. 조선 말기 고관 출신인 김윤식은 병합 당시 일제로부터 남작 작위를 받았는데, 3·1운동기 일본 정부에 독립청원서를 보냈다가 작위를 박탈당하고 2개월간 투옥되기도 했다. 그는 취운정 경성도서관의 초대 관장을 맡고 자신의 장서를 기증했다. 3·1운동기 보성학교 교장이었던 윤익선도 ‘조선독립신문’을 발간했다가 체포된 인물이다.

취운정 경성도서관의 개관에는 3·1운동 이후의 고양된 민족적 분위기, 양반 상류층의 공간이 대중의 공간으로 바뀌는 시대적 변화가 깔려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국문학자 가람 이병기(1891∼1968)는 일기에서 “전날 귀족들이 놀음놀이하던” 취운정이 도서관이 되었는데 “발가벗은 버드나무 사이로 다복한 애소나무숲을 보면서 한 걸음 두 걸음 나아가는 굽은 길에는 그윽하고 고요한 맛이 있어, 벌써 시끄러운 티끌의 괴로움을 잊게 한다. 과연 글 읽기에 마땅한 곳”이라고 썼다(가람일기, 1921년 1월 27일).

그러나 취운정 도서관도 1년여 만에 운영난에 빠져 1922년 이범승에게 인수됐다. 이범승은 교토제국대 출신으로 남만주철도회사에 근무했던 인물이다. 당시 특별한 직위가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매우 희귀한 ‘제국대 출신 조선인’으로서 총독부 고위 관리들과 교분이 있었다. 그래서 보조금까지 받아 도서관을 인수했다. 이범승은 탑골공원 옆에 석조 2층 건물을 신축하여 경성도서관을 재개관하고 취운정 도서관은 별관으로 운영했다.

‘조선 사람 경영’ 경성도서관을 소개한 매일신보(1923년 7월 27일). 이범승이 탑골공원 옆에 신축했다. 사진 출처 국립중앙도서관

경성부립도서관이 일본인 중심지인 명치정에 위치했기 때문에 자연히 “경성의 시가는 남편으로는 일본인이 많이 살고 북편으로는 조선 사람이 많이 있어” “조선인 편의 도서관은 방금 이범승 씨가 경영하는 경성도서관”으로 이해됐다(동아일보, 1922년 3월 17일). 이듬해에는 “조선 사람 경영으로 오직 하나인 경성도서관에서는 새로히 기쁜 소식을 전한다. 독일 가서 있는 우리 조선 유학생 6, 7인은 고국 청년의 수양과 공부를 위하여 독일 서적 중에 금강석이라고 할 만한 여러 책 1200여원어치를 사서 경성도서관에 기부하”는 일까지 있었다(동아일보, 1923년 8월 27일). 그러나 이범승의 경성도서관 역시 개인 운영의 한계를 넘지 못했다. 운영 경비를 감당하지 못해 1924년부터 휴관을 수차례 반복한 끝에 건물과 장서를 경성부에 인계해 1926년 4월 경성부립도서관 종로분관으로 다시 개관했다.

일제 말기 경성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한 소설가는 이런 기록을 남겼다. “붉은 벽돌 건물엔 권위주의적인 정적이 감돌고 있었고 감히 어디로 어떻게 들어가 책을 빌리는 절차를 밟아야 하는지 도무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안에 층층하게 고여 있는 어둡고도 서늘한 정적을 훔쳐보는 것조차 두려워서 가슴을 졸이며 열려 있는 문을 이 문 저 문 조심스럽게 엿보고 다니는데 정복을 입은 수위가 달려왔다.” “허, 고것들 참 하면서 이 도서관에는 아이들 열람실이 없으니 딴 도서관엘 가 보라고 했다. 수위 아저씨가 가르쳐준 딴 도서관은 거기서 가까웠다. 지금의 조선호텔 정문 바로 건너편에 있는 부립도서관이었다.”

경성부립도서관 어린이열람실은 “제 집 서가의 책처럼 마음대로 꺼내다 보고 재미없으면 갖다 꽂고 딴 책을 가져오기를 아무리 자주 되풀이해도 그만이었다.” “내 동무가 읽은 건 소공녀였고 끝까지 다 읽었다고 했다. 우리는 몹시 흥분해서 서로가 읽은 책 얘기를 주고받았고 다음 공일에도 또 가자고 약속했다.” “소공녀 세라도 하녀로 전락한 후 어느 때부터인가 문득 밤마다 그의 귀가를 기다리는 따뜻하고 맛있는 음식과 훈훈한 난로를 꿈처럼 경험하게 된다. 나에게 부립도서관의 어린이 열람실은 바로 그런 꿈의 세계였다.”

이는 박완서(1931∼2011)의 자전적 소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의 한 대목이다. 어린 소녀의 눈에 비친 총독부도서관과 경성부립도서관의 모습이 생생하다. 비록 일제 침략전쟁이 한창인 암울한 시기였지만 동화를 읽으며 꿈을 키우는 소녀가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훗날 한국 현대문학을 대표하는 소설가가 됐다.



염복규 서울시립대 국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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