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말하지 않아도 통하는 ‘축구 전설 1985’ 이태호 최순호
우린 평생 충청도 찐 ‘깐부’. 40년 인연은 시간에 구애받지 않는다. 처음 본 그날이 어제 같다. 최순호(왼쪽)와 이태호. 유재영 기자 elegant@donga.com
1986년 멕시코 월드컵 진출을 향한 아시아 최종 예선 1차전. 이때 아시아에 걸린 티켓은 단 두 장. 그중 동아시아 몫은 하나. 한국과 일본은 외나무다리에 마주 섰다. 이곳에서 어느 두 사람은 평생 우정의 끈을 잡았다.
● 6만 관중을 적막에 빠트린 둘의 단 한 번 시선 교환
이태호와 최순호는 32년 만의 월드컵 진출을 사실상 결정 짓는 골을 합작하며 평생 우정의 끈을 잡았다. 최순호의 기막힌 패스에 이은 이태호의 절묘한 마무리. MBC 유튜브 캡처
원정 경기에 나선 한국 대표팀은 조심스럽게 탐색부터 했다. 전반 30분, 일본 수비가 걷어낸 공이 공격에 가담한 수비수 정용환의 오른 발등에 정확히 걸렸다. 골망을 찢을 듯한 선제골. 경기장은 숨을 멈춘 듯 고요해졌다. 12분 뒤, 훗날 평생 절친이 되는 두 사람이 서로에게 ‘선물’을 건넸다.
● 직설과 여백이 만든 완벽한 타이밍
이름까지 ‘호’로 끝나는 둘에게 이날은 평생 술안주이자 밥반찬이다. 건빵 봉지에 든 별사탕처럼 씹을수록 단맛이 난다. 회상할 때마다 늘 새로운 장면을 끄집어 낸다. 죽어도 지면 안 됐던 한일전.
최순호는 경기 전에 ‘이태호와의 기적’을 어느 정도 예상했다고 한다. 이태호는 처음 듣는 얘기다. “김정남 감독님이 나를 쓰려고 하는 느낌만 받았다”는 최순호의 말은 이태호를 더 놀라게 한다.
“태호 네가 선발로 나갈 줄 알았어. 감독님이 날 부르더니 가운데에서 오른쪽 측면으로 계속 빠져서 기회를 노리라고 하셨어. 왼쪽은 (김)주성이에게 맡기고. ‘네가 이동하면 태호가 가운데로 들어올 거’라면서 ‘태호도 한가닥하는 친구니 기회를 살릴 거다’라고 한 말이 기억 나. ‘이렇게 해야 이긴다’고 거의 애원을 하셨어. 그런데 이 전술이 경기에 그대로 나온 거야.”
소름 돋는다는 이태호다.
“너하곤 원래 호흡이 잘 맞았잖아. 순호한테 패스가 가는 순간 무조건 날 봐 줄 것 같았어.”
사실 최순호도 스스로 놀랐다.
“태호야, 정말 축구에 관해선 내가 고집이 좀 있잖냐. 그런데 이날은 나를 버렸어. 축구 인생에서 감독님 말을 100% 들은 유일한 경기였다고.”
특별한 고백이었다. 이태호는 친구를 설득한 감독이나 팀 전체를 위한 ‘필승 그림’을 받아들인 최순호가 대단하고 고맙다. 김 감독이 나, 이태호를 확실한 선발 자원으로 여기진 않았지만 최순호 이태호 콤비만이 할 수 있는 ‘한 방’이 꼭 필요해 제안한 것이라 여긴다.
● “너 아니었으면 나 없었어”
서울 잠실올림픽주경기장에서 열린 2차전은 이태호와 최순호의 우정을 키운 또 다른 드라마였다. 1차전에서 골을 넣고 의기양양, 2차전에도 선발로 나선 이태호는 전반이 끝나고 교체됐다. 자신과 교체해 들어간 허정무가 결승골을 넣었다. 이태호는 무척 분했다.
“서울에서 월드컵 진출 주역이 되고 싶었거든. 그런데 교체가 됐으니 속이 상하더라고.”
벤치에서 후반전 내내 고개를 묻고 있었다고 했다. 승리라는 결과 앞에서 분이 풀리긴 했지만 아쉬웠다.
“태호야. 경기 중에 나를 봤어?”(최순호)
이태호는 몰랐다. 그저 최순호가 후반 때린 절묘한 왼발 슛이 일본 골대를 맞고 나왔고, 그것을 허정무가 골로 연결한 것만 기억한다. 그런데 최순호는 전반 막판 이시카미의 거친 태클로 무릎을 심하게 다쳤다.
“무릎이 완전히 꺾였다가 다시 튀어 나온 것 같더라고. 바로 인대가 크게 손상됐구나, 느낄 수 있을 만큼.”(최순호)
하프타임 때 락커룸에 누워 경기를 포기할까 생각하던 순간.
“누가 내 머리를 붙잡고는 ‘순호야, 너 없으면 안 된다. 꼭 뛰어야 한다’고 해. 고개를 돌려 보니까 김 감독이셔.”
그런 일이 있었는 줄 몰랐다. 최순호는 다친 무릎으로 후반에도 나갔다. 1차전 김 감독의 전략에 신뢰를 보낸 최순호는 그의 부탁을 외면할 수 없었다. 허정무의 골 세리머니에는 무릎 통증을 참을 수 없어 동참하지 못했다.
“정무 형이 골 넣고 내 반대쪽으로 가더라고. 하하.”(최순호)
“순호야, 그래서 혼자 손만 번쩍 들고 흔들었구나.”(이태호)
이태호는 지금 다시 생각하니 최순호가 자신 때문에 통증을 참고 후반에도 나가 준 것 같다. 이날 경기는 어떻게 보면 이태호 축구 인생에서 별 볼 일 없던 날이다. 최순호까지 후반에 못 뛰었다면 1차전 둘의 활약이 빛 바랠 수도 있었다.
“네가 나 대신 싸워 준 거네. 진짜 고마워. 순호야.”
최순호가 손사래를 친다. “괜찮아유.”
일본과의 2차전 허정무의 결승골이 터지자 그 자리에서 환호하는 최순호. 무릎이 아파서 허정무 쪽으로 달려가지 못했다. KBS 유튜브 캡처
● 말하지 않아도 알게 된 우리
이태호는 대전 출신이다. 대전상고(현 우송고)를 나왔다. 최순호는 고향이 충북 괴산이다. 청주상고를 나왔다. 충청남도와 충청북도가 각각 낳은 축구 전설이다.
같은 충청 출신인데 스타일은 다르다. 이태호는 달변이다. 말재주로 사람을 끈다. 최순호는 “대표팀이 외국 공항에서 비행기를 갈아 타기 위해 시간이 나면 태호의 진가가 나온다”고 했다. 한번 얘기를 시작하면 여러 화제를 넘나든다. 화려한 언변으로 동료들을 5~6시간 집중시킨 건 전설처럼 전해지는 얘기다.
그는 직설적이다. ‘MSG(조미료)’를 뿌리지 않는다. 이태호는 “나 다음에는 변병주가 분위기를 잡았다. 나는 있는 그대로 재밌게 얘기하는 편인 반면 변병주는 ‘구라’가 조금 심했다”고 또 웃긴다. 결정과 선택 상황에서 뜸 들이는 법이 없다. 신조가 ‘오늘 결혼하면 내일 아들 낳아야 한다’다.
최순호는 결이 조금 다르다. 감정이 막 드러나지 않는다. 담담하고 성찰적이다. 여백의 미가 있다. 이태호 같은 사람을 좋아하고 그 사람에게 잘 스며든다. 속으론 심지가 강하다.
한 사람이 날이 서 있다면, 다른 사람은 부드럽다. 한 사람은 순간의 결단을 잘하고, 다른 사람은 부드럽게 전체 그림을 잘 그린다. 결이 달라서 오히려 잘 맞았다. 서로에게 잘 흡수됐다. 축구 스타일도 성격과 닮았다. 이태호는 순간 위치 선정과 타이밍 맞는 침투를 잘하고 골 결정력이 있다. 최순호는 골을 잘 넣으면서 경기 조율 능력과 흐름 설계가 탁월했다.
“우리 46년째네.”
둘은 1979년에 처음 알았다. 이태호는 고려대 1학년, 최순호는 청주상고 3학년 때다. 호적 정리가 복잡한데, 어쨌든 친구다. 최순호가 “그냥 넘어가유. 알면 다쳐유”라며 원천봉쇄한다. 당시는 그랬다. 적게는 두세 살, 많게는 다섯 살 차이가 있어도 친구가 되는 일이 많았다.
이태호는 “삐쩍 마르고 키 큰 애가 잘한다는 얘기를 (정)해원이한테 들었다”고 했다.
최순호는 “중학교 3학년 때 대학보다는 실업으로 가겠다고 생각했다. 월급 받고 축구하면 더 잘할 것 같았다”고 했다. 그래서 간 청주상고에서 축구에 눈을 떴다. 당시 잘하는 선수는 거의 대학에 갔다.
“고3 때 한국전력으로 갈 수 있었어. 그런데 팀 분위기가 무섭더라고. 그래서 포항제철로 바꿨지.”(최순호)
이태호는 또 처음 듣는 얘기다.
“나는 네가 집안 사정이 어려워서 연고대나 다른 대학을 안 가고 실업 팀에 간 줄 알았지.”
둘은 그해 20세 이하 세계청소년축구선수권대회(현 U-20 월드컵) 대표팀에서 처음 만났다. 이태호는 청소년 대표팀 터줏대감이었고 최순호는 그해 봄에 처음 뽑혔다.
“운이 좋았어. 당시 청소년 대표팀 트레이너로 오신 김호 선생님(1994 미국 월드컵 대표팀 감독)이 나를 뽑아야 한다고 추천하셨다는 거야.”(최순호)
둘은 일본 고베에서 열린 이 대회에 나가 조별 리그 3경기를 같이 뛰었다. 이태호는 대표팀의 유일한 골을 넣었다.
“그때 우리가 붙어 다니지는 않았어. 마라도나 기억나? 우리랑 같은 호텔에 묵었잖아. 정말 작은 친구가 마라도나라고 해서 데리고 나가서 겁이라도 주고 싶었지. 하하.”(이태호)
1980년대 초반 한일전에 앞서 양국 출전 선수들과 심판진, 양국 축구협회 회장 등이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첫째 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이태호, 그 바로 뒤가 최순호다. 이태호 제공
1980년 5월 둘은 성인 대표팀에 같이 소집돼면서 각별해졌다. 그해 아시안컵 준우승 이후 대표팀은 1982년 뉴델리 아시안게임 및 스페인 월드컵 예선과 1984년 LA 올림픽 아시아 예선 등에서 번번이 미끄러졌다. 이태호는 쟁쟁한 선배들에 밀려 벤치에 머무는 시간이 길었다. 기대는 상처가 됐다.
“초등학교 이후로 후보를 해 본 적이 없거든. 그런데 벤치에 있으니까 막 분한 거야. 1980년 대통령배 국제축구대회 때도 고향 대전공설운동장에서 경기가 있었는데 배려를 해주셨으면 좀 좋았겠냐고. 하하. 팬들이 내 이름 적힌 플래카드 걸어 놓고 했을 것 아냐. 그런데 1분도 못 뛰었어. 열 받아서 경기 끝나고 유성에서 대표팀 회식을 하는데 술 먹고 꼬장을 부렸지. 이강조 형이 옆에서 말리고 그랬어.”(이태호)
“나는 태호처럼 이런 게 없었어. 그때만 해도 뛰라면 뛰고 말라면 마는 거였지. 운이 좋긴 했어. 고등학교 3학년 10월부터는 포철에 합류해서 훈련했는데, 김정남 감독이 포철 코치로 온 거야. 계속 둘이 같이 훈련했겠지. 김 감독께서 1980년에 대표팀 감독이 되셨잖아.”(최순호)
최순호는 대표팀에서 준수한 활약을 했지만 적극적으로 뛰지 않는다는 시선과 지적 때문에 오래 혼란스러웠다.
“활동량이 많은 편이긴 한데 대표팀에선 많이 안 뛰었어. 설렁설렁 한다고 욕을 자주 먹었지. 그런데 대표팀에는 (나보다) 빠르고 재능 있는 선수가 많았잖아. 난 골 넣고 도움 주는 것만 신경 쓴 거지.”
뉴델리 아시안게임 조별리그에서 일본에 져서 충격의 예선 탈락을 한 뒤에는 극심한 컨디션 난조를 겪기도 했다. 최순호는 “그 뒤로 폼이 급격하게 무너졌다”고 했다.
이태호도 잘 안 풀렸다. 선발로 많이 나간 대회에서는 팀 성적이 좋지 않았다. 1982 스페인 월드컵 아시아 최종예선 쿠웨이트와의 경기에선 석연치 않는 퇴장을 당했다.
둘은 1983년 LA 올림픽 아시아 예선 때 불합리한 대표팀 운영을 지적하며 태릉선수촌을 무단 이탈하기도 했다. 이태호가 주도하고 친구가 따랐다. 아무 생각없이 선수촌을 나가면서 외출증을 끊지 않았던 게 화근이 됐다. 징계도 받고 많이 힘들었다.
“젊은 혈기에 참을 수 없었어.”(최순호)
“지금은 그렇게 못 하지. 그래도 선수촌 밖에 있는 동안 재밌게 놀았어. 내가 (프로축구 팀) 대우에 있었잖아. 팀 높은 관계자를 찾아가니 100만 원 주셨잖아. 갈비도 먹고 잘 돌아다녔네. 하하.”(이태호)
1980년대 중반 대통령배 국제축구대회 경기에서 최순호(오른쪽에서 두 번째)와 함께 선발로 나선 이태호(오른쪽에서 다섯 번째).이태호 제공
4년 동안 대표팀 한솥밥을 먹으며 끈끈해진 둘에게 황금 같은 시절이 찾아온다. 경기장에선 눈빛만 봐도 서로가 뭘 원하는지 알았다.
“1985년 대통령배 국제축구대회 때 내가 힐패스한 공을 순호가 다시 힐킥으로 밀어 줘서 내가 골을 넣었잖아. 기억나? 우리가 느린 것 같아 보이는데 순간 빨랐어. 몸이 반응하잖아.”(이태호)
“충청도잖유. 충청도 말이 느린 것 같으면서도 짧게 압축해서 정곡을 찌르잖냐. 몸도 그려.”(최순호)
둘은 몇 달 뒤 한일전에서 평생 우정을 약속하는 역사적인 골을 합작한 것이다.
● 최순호의 월드컵 원더 골과 이태호
1986 멕시코 월드컵 예선 3차전 이탈리아와의 경기에서 역사에 남는 중거리포로 골을 터트린 최순호가 만세를 부르고 있다. MBC 유튜브 캡쳐.
최순호는 후보를 죽도록 싫어하는 이태호의 마음을 너무 잘 알았다. 그렇다고 티를 내고 챙길 수도 없었다. 속으로 미안했기에 책임감을 더 느꼈다. 이태호와 같이 못 뛴다면 어떻게든 친구 몫까지 하고 싶었다.
아르헨티나 및 불가리아와의 대결에서 1무 1패를 하고 맞선 3차전 이탈리아. 그런데 최순호에게도 불편한 상황이 왔다.
“태호야, 내가 불가리아 전에 안 나왔잖아. 이걸 기억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거야. 대표팀에 소집되서 선발로 못 나간 게 이때가 두 번째였을 거야. 기분이 안 좋아서 이탈리아 경기엔 안 나간다고 했어. 그러니까 창선이 형, (조)영증이 형이 다독이면서 마음을 풀어 주더라고.”
얼어붙은 마음을 되돌린 건 이태호에 대한 책임감 때문이 아니었을까. 어떻게 보면 최순호 축구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순간에 이태호 덕에 최순호가 버텼다. 그리고 이탈리아 전에서 최순호는 세기의 중거리슛 골을 터트리고 두 주먹을 불끈 쥐며 포효했다. 역대 월드컵에서 나온 가장 아름다운 골 중 하나로 꼽힌다.
“네가 슛을 할려고 볼을 오른쪽 약간 뒤로 접어 놓고는 기가 막히게 꺾어 때렸잖아. 그 경기에서 네가 볼을 접은 각도, 슛을 때리는 순간 발목의 각도를 난 분명하게 기억해. 내가 정말 좋아하는 각도거든. 경기도 못 나가고 열 받아 있었는데, 그 순간만큼은 소름이 돋아서 소리를 질렀지.”(이태호)
둘은 은혜를 주고받았다고 말한다. 아무리 유명하다 해도 국민이 기억할 만한 역사적인 골을 넣은 선수는 많지 않다. 그것을 서로가 만들어 줬다. 이태호는 “그래서인가. 순호가 나한테 고맙다며 한일전에서 또 한 번 골을 넣게 해줬다”고 했다.
1989년 서울 동대문운동장에서 열린 한일 정기전 후반전, 최순호는 수비를 제치고 측면을 돌파해 이태호에게 시쳇말로 ‘밥상을 차려주는’ 패스를 했다. 이태호는 숟가락만 들고 맛있게 먹었다. 1-0 승리. 결승골이었다.
“순호 때문에 내가 일본 킬러가 됐어. 하하.”
최순호가 친구 이태호(가운데)를 다시 ‘일본 킬러’로 만들어 준 장면. 1989년 한일 정기전에서 이태호가 후반 결승골을 터트린 뒤 환호하고 있다. 왼쪽 등번호 14번이 이태호에게 완벽한 패스를 내 준 최순호다. 양팔을 쳐들며 기뻐하고 있다. 대한축구협회 제공
● ‘쬐끔’ 고집 있는 충청도 축구 콤비
1984년 축구대체전 슈퍼리그 시상식에서. 왼쪽부터 득점왕 백종철, 골든볼을 든 이태호, 득점 2위 최순호, 득점 3위 김용세. 이태호 제공.
11년간 국가대표로 A매치 90경기에서 37골을 넣고 은퇴한 최순호는 프로축구 포항에서 두 차례, 강원에서 한 차례 감독을 지냈다. 서울과 수원 FC 단장직을 맡았고 대한축구협회 부회장도 역임했다. 축구인으로 감독과 행정, 경영을 다 경험했다.
국가대표로 A매치 80경기에서 24골을 넣은 이태호는 프로축구 대전 감독으로 부임하자마자 FA컵 우승을 일궈 냈다. 이후 고교와 대학 감독을 맡았고 지금은 강동대 감독이다.
둘 다 바빠 자주 보지는 못한다. 그렇지만 둘의 우정은 시간의 벽을 넘어선다. 마음으로 통한다. 남이 보기에 골 넣은 얘기는 영웅담 같지만 둘에겐 일상생활 이야기다.
최순호(왼쪽)와 이태호. 40년 전 키 그대로다. “앞으로는 눈높이 맞추며 같은 높이에서 살아봐유.” 유재영 기자 elegant@donga. com
“꽈리야. 15년 뒤에 인터뷰 또 같이 혀. 지금은 기억이 없는데 나중에라도 1985년, 1986년 때 일이 새롭게 생각날 수도 있는 거 잖유.”(최순호)
꽈리는 이태호의 별명이다. 고등학교 때 선배한테 맞아 터진 입술을 몇 바늘 꿰메고 나니 크게 부풀어 꽈리를 닮았다고 해서 붙여졌다. 나중에 대우에서 뛸 때는 당시 안종복 단장이 말을 잘 꼬아 재미있게 한다는 의미로 ‘꽈리’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래 순호야. 1979년에 만나서 안 죽고 살아 있는 것도 다행이다. 자주 보자.”
맛이 있는 우정이다. 충청도 느린 말투와 직설적인 농담이 뒤섞인다. 흐름 자체가 이태호와 최순호의 관계를 설명한다. 직설과 여유, 냉정과 농담이 공존한다. 서로를 미화하지 않고 기억하며 인정해 주고 웃는다. 지금 보니 주고받은 선물은 골이 아니라 서로의 이름 같다. 두 이름의 조합은 레전드를 넘어 ‘깐부’다.
유재영 기자 elegan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