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근형 파리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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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덴마크령 그린란드의 최대 도시 누크를 다녀왔다. 현장 취재를 진행하다 만난 초등학교 교사 마리나 클라센 씨의 집을 찾았다. 그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재집권 이후 피폐해진 실상을 설명하다 “꼭 보여주고 싶은 게 있다”며 기자를 집으로 안내했다. 누크 도심에서 차로 15분 남짓 떨어진 그의 집은 한국의 평범한 저층 아파트를 떠올리게 했다. 창밖으로 내려다보이는 누크 앞바다와 눈 덮인 시내 전경은 이곳이 최근 전 세계의 주목을 받는 분쟁지역으로 부각되고 있다는 사실을 잊게 할 만큼 평온했다.
하지만 다용도실 한편에 놓인 전쟁 대비용 ‘탈출 가방’을 보는 순간 평온함은 무너졌다. 그는 “트럼프의 말은 농담이 아니다. 공습에 대비한 준비가 필요했다”며 가방 안 물건들을 하나하나 꺼내 보였다.
美 공습 대비 ‘탈출 가방’ 챙긴 그린란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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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눈에 띈 것은 금속 재질의 원통형 보관함이었다. 뚜껑을 열자 자신과 홀로 키운 아들의 출생증명서, 부모 관계를 증명하는 서류가 들어 있었다. 물에 젖거나 훼손되지 않게 금속 통을 골랐다고 했다. 클라센 씨는 “전쟁이 나서 난민이 되거나, 혹시라도 죽거나 다치면 누군가는 우리가 그린란드 사람이라는 걸 알아야 하지 않겠냐”고 했다. 그린란드 사람들이 느끼는 전쟁에 대한 공포가 어느 정도인지를 가늠하기 충분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그린란드 병합 야욕’을 두고 ‘또 하나의 기행’이나 ‘협상용 수사’로 치부하려는 시각이 적지 않다. 기존 통념상 불가능해 보이는 카드를 던지면서 자원 채굴권 등 막후 이득을 얻으려는 전략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린란드 주민들에게는 결코 정치적 수사가 아니었다. 단순 ‘분노’를 넘어 일상을 송두리째 흔들고 있음을 현장에서 여러 차례 목격했다.
‘그린란드의 두려움’, 남의 일 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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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를 겪은 민족으로서 “우리를 사려고 하지 말라”, “우린 매매의 대상이 아니다”라는 그린란드인의 외침은 남의 일처럼 들리지 않는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후 구축된 국제 질서가 송두리째 흔들리고 있는 지금 5만6000여 명의 그린란드인 앞에 놓인 현실은 연민이나 공감만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트럼프 대통령의 말 한마디에 대서양 동맹이 흔들리고, 그 여파가 북극의 일상을 파고들고 있다. 개화기 강대국에 운명이 내맡겨졌던 우리의 과거를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다. 트럼프 대통령의 다음 시선이 중국이나 북한으로 향한다면 그린란드인들이 느끼는 두려움은 언제든 우리의 몫이 될 수 있다.
그린란드 현장에서 출생증명서까지 챙기는 클라센 씨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과연 우리를 지킬 준비가 돼 있는가’라는 질문을 떨칠 수 없었던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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