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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희 칼럼]그린란드를 보며 평택을 걱정하는 시대

입력 | 2026-01-26 23:21:00

‘트럼프&아이들’의 폭주는 늘 상상초월
자유주의 질서 파괴, 동맹 모욕 일상화
내부 견제도 무력해져 민주주의 위기로
韓, 안팎 견고히 다지며 최악 대비해야



이철희 논설위원


무슨 일을 벌이든 요란하기로는, 멈춤이나 U턴도 느닷없기로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능가할 이가 없다. 새해 벽두부터 베네수엘라 권력자를 갈아치우고선 덴마크령 그린란드를 차지하겠다며 협박과 모욕을 일삼던 트럼프가 지난주 돌연 협상 쪽으로 돌아섰다. 한바탕 소용돌이가 지나간 뒤 ‘트럼프는 늘 겁먹고 물러선다(TACO)’느니, ‘트럼프식 거래의 기술이었다’느니 호사가들의 해설이 이어지지만, 한편으로 트럼프가 그처럼 세상을 뒤집어 놓은 기괴한 발상의 근원을 추적하는 것은 언론의 또 다른 과제가 됐다.

그린란드에 대한 트럼프의 야심이 처음 세상에 알려진 것은 트럼프 1기 시절인 2019년 8월 월스트리트저널을 통해서였다. 트럼프가 그린란드 구입 방안을 찾으라고 참모진을 끊임없이 채근하고 있는데, 일부 측근도 농담으로 여긴다는 내용이었다. 트럼프는 “미국을 위한 거대한 부동산 거래가 될 것”이라고 속내를 숨기지 않았지만, 덴마크도 그린란드도 “터무니없다”고 일축하면서 잠깐의 해프닝으로 묻혔다.

하지만 이번 소동을 계기로 트럼프의 60년 지기이자 글로벌 화장품 기업의 상속자 로널드 로더가 이미 2018년부터 그린란드 구매를 부추겼다는 존 볼턴 당시 국가안보보좌관의 증언이 나왔다. 볼턴은 “트럼프는 친구로부터 들은 단편적 정보를 진실로 간주한다”고 털어놨다. 평생 이기느냐 지느냐, 뺏느냐 뺏기느냐의 제로섬 세상을 살아온 트럼프다. 일단 입력된 ‘미달성 사업구상’은 머릿속을 떠나지 않은 채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것이다.

사실 트럼프 1기 때만 해도 그는 이른바 ‘어른들(adults)’이 막아서면 주춤하고 물러서는 ‘투덜이 왕’이었다. 지금은 그의 말 한마디면 곧바로 실행 모드에 들어가는 충성파 가신들을 거느린 ‘괴팍한 황제’다. 그는 부통령과 국무장관까지 ‘애들(kids)’이라 부르고, 유럽 동맹기구 수장은 그를 ‘아빠(daddy)’라 칭한다. 노벨평화상 수상자가 자신의 메달을 헌납해도 거절할 줄 모르는, 나아가 노벨상을 못 받았으니 ‘아차상’ 쯤으로 그린란드를 갖겠다는 그 뻔뻔함은 또 어떤가.

트럼프는 재집권하자마자 그간 미국이 이끌어온 자유주의 국제질서를 철저히 뒤흔들었다. 무차별 관세폭탄으로 자유무역 질서를 무너뜨렸고, 동맹에도 “FAFO(까불면 다친다)”라고 협박하는 약탈적 패권자가 됐다. 이제 그는 “내겐 국제법도 필요 없다. 내가 생각하는 도덕성만이 유일한 제어장치다”라고 호언한다.

이런 대외적 횡포의 근저에는 미국 민주주의의 퇴행이 있다. 권력의 견제와 균형, 국민의 동의와 참여는 사라진 채 분열과 갈등만 깊어지고 있다. 트럼프는 지난 1년간 대통령의 권력을 강화하며 내부 견제장치를 무시하거나 우회하면서 밀어붙였다. 의회도 법원도 머뭇거리는 사이 무차별 이민 단속에 군대까지 배치했고 법무부를 동원한 정치적 복수도 서슴지 않았다. 이대로 가면 트럼프의 3선 도전이라는 최악의 시나리오도 현실화할지 모른다.

미국의 위기는 곧 세계의 위기다.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무엇보다 미국의 핵우산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안보동맹으로서 트럼프의 동맹 모욕은 결코 남의 일일 수 없다. 트럼프는 작년 8월 워싱턴 한미 정상회담에서 평택 미군기지를 두고 “그 땅을 임대가 아닌 소유 형태로 바꾸는 방안을 추진하고 싶다”고 했다. 앞서 2017년 방한해선 평택 기지를 둘러본 뒤 ‘한국이 건설비 90%를 부담했다’는 얘기를 듣고도 “왜 100%를 받아내지 않았느냐”고 따졌던 트럼프다. 지금 우리는 그린란드 사태를 보면서 평택을 걱정해야 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우리 내부의 제도적 견고성은 어떤가. 불과 1년 전 대통령의 친위 쿠데타를 겪었던 한국이다. 최근 한덕수 전 국무총리의 12·3 내란 가담에 대한 법원의 중형 선고는 2020년 미국의 1·6 의사당 난입 사태 때 마이크 펜스 부통령의 행동을 떠올리게 한다. 트럼프의 대선 불복 요구와 폭도들의 “펜스 처단” 외침에도 민주적 절차에 충실했던 2인자의 강직한 처신이 마지막 순간 친위 쿠데타의 성공을 막았다. 물론 4년 뒤 트럼프의 복귀를 막을 순 없었지만.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듯 권력은 서로 닮아가며 타락한다. 트럼프가 권위주의 독재자들을 선망했듯이. 우리의 오랜 모델이었던 미국이지만 그 퇴락까지 닮아갈 수는 없다. 세계가 뒷걸음칠수록 우리는 안팎으로 스스로를 점검해야 한다. 대외적으로 동맹과 연대를 정교하게 관리하고 내부적으로 민주와 법치를 더욱 단단히 다져야 한다. 그것이 거센 탁류가 몰아쳐도 버틸 수 있는 안전자산이다. 



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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