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재 장기화로 화폐가치 폭락-물가 상승 혁명 주도했던 상인층 가게 닫고 거리로 대학생·여성도 합세해 파급력 더 커져
29일(현지 시간) 이란 테헤란 도심에서 상인·자영업자 시위대가 행진하고 있다. 이란의 통화 가치가 미 달러당 142만 리알까지 폭락하자 상인과 자영업자들이 이틀째 항의 시위에 나섰다. 목격자들은 경찰의 강제 진압이나 단속은 없었지만, 시위 현장에는 보안이 강화됐다고 말했다. 2025.12.30. 테헤란=AP/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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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 28일부터 현재까지 이란에서 대규모 반정부 시위가 이어지고 있다. 사상 최저치로 떨어진 리알화, 고물가, 에너지 가격 인상, 상시화한 전력난과 단수 등 민생고에 항의하는 차원이다.
특히 신정일치 국가 이란의 이슬람 보수주의 집권 세력을 지지해 왔던 상인들이 이번 시위를 주도한다는 점에서 대학생과 진보성향 지식인 등이 주도했던 과거 반정부 시위보다 파급력이 훨씬 크다는 평가다. 이미 이란 안팎에선 2022년 9월 히잡을 쓰지 않았다는 이유로 의문사한 소수민족 쿠르드족 여성 마사 아미니(당시 22세) 사태에 항의하는 반정부 시위에 버금가는 규모로 시위가 확산되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이번 시위가 1989년부터 장기 집권 중인 최고지도자 알리 하메네이(87)의 거취 및 후계 구도에 영향을 미칠 가능성도 거론된다. 하메네이는 집권 내내 반대파를 탄압했다. 또 국제사회의 제재 속에서도 핵과 미사일 개발을 추진하며 중동의 군사강국을 지향했다. 하지만 6월 이뤄진 이스라엘과 미국의 공습을 제대로 막아내지 못해 예전만큼의 권위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영국 BBC는 이번 시위대의 구호가 “가자도 레바논도 아닌, 이란을 위해”라고 전했다. 해외 무장단체 지원과 분쟁 개입 대신 민생을 돌보라는 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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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일(현지 시간) 이란 테헤란 도심에서 상인·자영업자 시위대가 행진하고 있다. 이란의 통화 가치가 미 달러당 142만 리알까지 폭락하자 상인과 자영업자들이 이틀째 항의 시위에 나섰다. 목격자들은 경찰의 강제 진압이나 단속은 없었지만, 시위 현장에는 보안이 강화됐다고 말했다. 2025.12.30. [테헤란=AP/뉴시스]
● 리알 사상 최저에 상인 집단 반발
이번 시위는 미국 달러 대비 사상 최저치로 떨어진 리알화가 촉발시켰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로이터통신 등에 따르면 달러 대비 리알 환율은 28일 달러당 142만 리알로 사상 최저치를 기록했다. 환율 변동에 민감한 상인 집단이 반발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2015년 이란이 서방 5개국과 핵합의(JCPOA·포괄적 공동행동계획)를 맺고 제재 해제 기대감이 고조됐을 당시 환율은 달러당 약 3만2000리알이었다. 불과 10년 만에 리알 가치가 44분의 1 수준으로 급락한 것이다.
리알 가치는 2024년 12월만 해도 달러당 80만 리알대를 유지했다. 그러나 집권 1기 때부터 이란에 적대적이었던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재집권하면서 올해 4월 100만 리알을 돌파했고 이후에도 줄곧 달러 대비 하락세다. 화폐 가치 하락을 방어하지 못한 여파로 모하마드레자 파르진 전 중앙은행 총재는 같은 해 12월 29일 전격 경질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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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 29일 시위에서는 상당수 상인이 가게 문을 닫고 당국에 저항했다. 한 시민은 AP통신에 “현 상황에서 사업을 하는 게 의미가 없다. 정부가 외환시장에 즉각 개입해 화폐가치 하락을 막고 투명한 경제 전략을 수립해 달라”고 요구했다.
하루 뒤인 30일 수도 테헤란에서는 테헤란대, 베헤슈티대 등 최소 6개 대학에서 대학생들이 시위에 나섰다. 이스파한, 야즈드 등 다른 도시에서도 시위가 벌어졌다. 개혁파이며 상대적으로 온건한 성향인 마수드 페제슈키안 대통령은 “시위대와 대화하겠다”고 밝혔지만 하메네이가 실권을 쥐고 있는 터라 사태 해결에 큰 도움이 되지 못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 한계 봉착한 하메네이 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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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메네이는 2002년 이란의 핵개발 의혹이 제기된 후 20년 넘게 서방이 각종 제재를 가했지만 ‘내수를 강화해 서방에 맞서겠다’는 원론적인 입장만 고수하고 있다. 세계적인 원유 및 천연가스 보유국임에도 시설 낙후화로 휘발유를 수입해 쓴다. 잦은 정전과 단수 또한 이런 인프라 부족과 무관하지 않다. 2019년 11월 반정부 시위 또한 당국의 기습적인 에너지 가격 인상에 반발한 시민들이 거리로 나오면서 시작됐다.
특히 하메네이 정권이 경제난 중에도 팔레스타인 무장단체 하마스, 레바논의 친이란 무장단체 헤즈볼라, 예멘의 친이란 반군 후티 등을 계속 지원하는 것도 국민 불만을 키웠다.
올 6월 이스라엘과의 ‘12일 전쟁’ 당시 핵과 미사일 관련 시설이 대거 파괴된 것도 하메네이의 정치적 입지와 ‘중동의 군사강국’ 이미지를 크게 훼손했다. 이미 트럼프 미국 대통령,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는 29일 회동에서 “이란이 핵 시설 재건과 미사일 전력 재비축을 기도한다면 군사 행동의 대상이 될 것”이라고 경고한 상태다.
파리=유근형 특파원 noel@donga.com
이지윤 기자 leemail@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