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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아그네스에서 명성왕후까지…‘1세대 연극스타’ 윤석화 뇌종양 투병중 별세

입력 | 2025-12-19 14:35:00


2023년 9월 자택에서 동아일보와 만난 배우 윤석화는 “인생의 수많은 변곡점 가운데 나를 키운 건 기쁨이 아닌 고난의 순간이었다. 그 앞에서 굴복하지 않은 게 윤석화”라고 했다. 이훈구 기자 ufo@donga.com

‘1세대 연극 스타’로 활약해 온 배우 윤석화가 19일 별세했다. 향년 69세.

연극계에 따르면 윤석화는 이날 오전 9시 54분경 서울 신촌세브란스병원에서 유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숨을 거뒀다. 그는 2022년 7월 연극 ‘햄릿’ 이후 그해 10월 악성 뇌종양 수술을 받으며 투병해 왔다.

고인은 19살이 된 1975년 민중극단의 연극 ‘꿀맛’으로 데뷔해 연극인의 길을 걸었다. 원래는 교사나 의사, 현모양처가 꿈이었다는 그는 개성 있는 목소리 덕에 광고에 삽입되는 CM송을 부르며 방송국을 드나들었다. “열두 시에 만나요…”로 시작하는 부라보콘 CM송과 “하늘에서 별을 따다…” 오란씨 CM송이 모두 고인의 목소리다.

어느 날 ‘탤런트가 되어보겠냐’는 제안을 한 PD에게 “탤런트는 관심 없고 연극하고 싶다”고 답해 함께 찾은 민중극단에서 배우로 커리어를 시작했다.

2016년 연극 ‘마스터 클래스’에서 주인공 마리아 칼라스를 연기한 윤석화. 동아일보DB


고인은 1983년 직접 번역하고 주역을 맡은 연극 ‘신의 아그네스’로 연극계 간판 배우로 발돋움했다. ‘신의 아그네스’는 실험극장 초연 당시 최장기 공연(532회)과 최다 관객 동원(10만 명) 등을 기록하며 돌풍을 일으켰다. 이 작품으로 고인은 1984년  여성동아가 제정한 제1회 여성동아대상을 받기도 했다.

고인은 또 연극 ‘덕혜옹주’(1995년), ‘햄릿’(2017년) 등 굵직한 작품에서 활약하며 배우 손숙, 박정자와 함께 국내 연극계를 이끈 여성 연극인으로 자리매김했다.

2012년엔 제작자로 변신해 영국 런던 웨스트엔드에서 ‘원더풀 타운’을 무대에 올렸다. 국내 뮤지컬 시장이 싹트기 시작한 1970년대부터 ‘신데렐라’(1976년)에 발을 들인 뒤 ‘명성황후’(1996), ‘넌센스’(2001) 등 한국 뮤지컬사의 의미 있는 작품들에 출연하거나 제작했다.

연극계의 발전을 도모하는 활동도 활발했다. 1994년 자신의 이름(石花)에서 착안한 잡지사 ‘돌꽃컴퍼니’를 설립했다. 1999년에는 음악전문지인 월간 ‘객석’을 인수해 종합예술지로 발행했다.

2002년에는 후배 배우들이 자유롭게 연기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고자 대학로에 설치극장 ‘정미소’를 열었다. 오래된 목욕탕 건물을 고쳐 만든 192석 규모 소극장으로 ‘쌀을 찧어내듯 예술의 향기를 피워내자’는 바람을 담아 17년 간 운영했다.

고인의 건강이 나빠진 건 2022년 8월이었다. 런던 출장길에서 갑자기 쓰러져 귀국했는데, 악성 뇌종양이 발견돼 20시간이 넘는 대수술을 받았다. 이후 꾸준히 항암치료를 받았으나, “한 달을 살더라도 윤석화답게, 담대하고 열정적으로 살자”며 항암치료를 중단하기도 했다.

그의 마지막 무대는 2023년 8월이었다. 배우 손숙의 데뷔 60주년 기념 연극 ‘토카타’에 외롭게 앉아 있는 노인 역할로 5분 가량 우정 출연했다. 고인은 그 해 한 인터뷰에서 “완전히 건강을 되찾는다면 런던 웨스트엔드에서 성공적인 공연을 올리는 것이 꿈”이라고 했다.

1989년 동아연극상 여자연기상을 비롯해 백상예술대상 여자 연기상(1984, 1989, 1996년)과 한국연극배우협회 올해의 배우상(1996년), 한국뮤지컬대상 연출상(2004년), 대한민국문화예술상(2009년) 등을 수상했다.

국내 입양 기금 마련을 위한 활동을 지속한 공로를 인정받아 2005년 어린이날 대통령 표창을 수상하기도 했다. 2022년에는 연극 분야 발전과 문화예술 진흥에 기여한 공로로 카자흐스탄 국립예술대학교(KazNUA) 명예박사학위를 받았다.

유족으로는 남편 김석기 씨, 장남 수민 씨, 딸 수화 씨가 있다. 빈소는 서울 세브란스병원, 발인 21일 오전 9시. 02-2227-7500



사지원 기자 4g1@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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