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혁명 직후 美로 망명 음악 이면의 인간적 삶 조명 ◇라흐마니노프, 피아노의 빛을 따라/피오나 매덕스 지음·장호연 옮김/424쪽·2만3000원·위즈덤하우스
책은 러시아를 떠나던 순간부터 미국과 스위스 등에서 보낸 말년의 시간까지 라흐마니노프의 생애를 정교하게 복원한다. 혁명 직전 총성이 울리던 모스크바의 혼란, 모든 것을 뒤로하고 국경을 넘던 귀족 지주의 아들, 그리고 미국에서 1100회가 넘는 무대에 오르며 생계를 꾸려야 했던 스타 피아니스트의 삶까지.
책을 마주한 이들은 ‘교향곡 2번’의 작곡가가 아니라 쥐와 바퀴벌레, 폭풍우와 외로움을 병적으로 싫어하고, 작곡할 때는 “아침 아홉 시부터 밤 열한 시까지 자신에게 쉼을 허락하지 않는다”고 기록한 근면한 노동자로서의 라흐마니노프를 마주하게 된다. 그는 말년 작품인 ‘교향적 춤곡’을 “마지막 명멸하는 불꽃”이라 부르며 병약한 몸으로 끝까지 완성하려 애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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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전 일부 비평가들은 라흐마니노프의 음악을 “감상적이고 모던하지 않다”고 평가했다. 그런 ‘낙인’에 대해 라흐마니노프는 스스로를 “낯선 세상에서 배회하는 ‘유령’ 같다”고 표현하며 “신속히 종교를 바꾼 ‘나비 부인’처럼 내가 믿는 음악적 신을 곧바로 내쫓을 수는 없다”고 말한다.
저자는 이 고백을 단순히 ‘보수성’의 표현이 아니라, 망명자가 겪는 상실과 소속의 문제로 읽어낸다. 그러면서 그의 음악이 왜 시대의 유행에서 비켜 서 있었는지를 차분하게 설명한다. 동시에 영국 라디오 ‘클래식 FM’이 2021년 ‘명예의 전당’ 25주년을 맞아 발표한 ‘역대 종합 1위’에 ‘라피협 2번’이 선정됐다는 사실을 통해 그의 음악적 가치에 대한 오랜 논쟁이 어느 정도 정리됐다는 점을 덧붙인다.
라흐마니노프의 선율을 사랑하는 이들에게는 음악 뒤에 숨겨진 삶의 결을 조금 더 자세히 볼 기회다. 그를 잘 몰랐다 해도, 한 인간의 초상으로 라흐마니노프를 마주하는 탄탄한 입문서가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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