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 시대, 전 세계가 갖고 싶어서 안달난 산업이 있죠. 바로 반도체 제조업인데요. 이 반도체 제조업을 키우기 위한 ‘쩐의 전쟁’이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습니다. ‘부활’을 외치며 마구 내달리는 일본, ‘반도체 제조국’ 문턱에 이제 막 선 인도, 오일머니를 내세운 아랍에미리트까지.
특히 정부 지원을 기반으로 가파르게 성장한 중국 반도체 기업의 최근 기세는 무서울 정도입니다. 왜 각국이 지금 반도체에 이렇게까지 사활을 거는 걸까요. 오늘은 글로벌 반도체 쩐의 전쟁을 들여다보겠습니다.
아무 나라나 갖지 못한 산업, 첨단 반도체 제조. 이를 향한 무한 경쟁이 펼쳐지고 있다. 게티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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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판 TSMC? 그게 돼?
“정부가 추진하는 위기관리 투자의 핵심이며, 국가의 이익을 위해 반드시 성공시켜야 하는 국가적 프로젝트입니다.”지난 11월 아카자와 료세이 일본 경제산업성 장관이 반도체 기업 ‘라피더스’의 제 2공장 신설 계획을 발표하면서 이렇게 말했죠. 라피더스가 뭐길래 이렇게까지 비장한가 싶은데요. 위탁생산, 즉 파운드리를 전문으로 하는 반도체 기업입니다. 토요타·키옥시아·소니·NTT 등 일본 대기업 8곳이 공동으로 2022년 설립했죠. 사실상 일본 정부가 대기업들을 동원해서 만든 신생 ‘반도체 연합군’입니다.
라피더스가 홋카이도 치토세시에 건설 중인 첫 번째 첨단 반도체 제조공장 이미지. 2023년 9월 착공했고, 2027년 양산에 돌입할 예정이다. 최근 치토세시에 2027년 두 번째 공장을 착공한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라피더스 홈페이지
일본은 이미 2000년대 초반, 반도체 미세화 경쟁에서 탈락했습니다. 현재 일본에선 40나노짜리 범용 제품만 양산할 수 있죠. 그런데 일본에서 대가 끊긴 지 오래인 미세공정 파운드리 산업을 되살리겠다고 국가가 깃발을 들고 나선 겁니다. ‘일본의 TSMC’를 만든다는 거창한 목표를 가지고요.
당연히 쉬울 리 없죠. 최첨단 반도체 공정 기술은 양산 경험이 누적되면서 단계적으로 쌓여가는 겁니다. 18, 14, 10, 8, 7, 6, 5, 4, 3나노. 이런 식으로 단계를 거쳐야 2나노, 1.4나노 초미세 공정을 위한 기술 노하우를 쌓을 수 있는 거죠. 경험 없이 돈과 장비만 쏟아붓는다고 갑자기 점프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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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7월 일본 라피더스가 ‘2나노미터 공정의 초미세 트랜지스터 프로토타입’ 개발에 성공했다며 밝힌 시제품 이미지. 라피더스 제공
‘반도체 부활’의 마지막 희망, 라피더스의 성공에 일본 정부가 사활을 걸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요. 일본 언론은 제2공장 건설에 정부 지원과 대출 보증, 민간기업 출자로 2조엔(약 19조원) 이상이 들 거라고 전망했죠.
이렇게 되면 2022년부터 2031년까지 라피더스에 총 7조엔(약 66조원)을 투자한다는 뜻이 되는데요. 일본 정부는 이례적으로 민간기업 라피더스에 대해 대출 보증까지 서면서 영혼까지 끌어모아 지원하고 있죠.
솔직히 성공 확률 면에서 여전히 무모한 도전 같아 보이는데요. 다카이치 사나에 정부는 ‘첨단 반도체는 경제 안보의 문제’라고 강조합니다. 그만큼 진심이고 집요한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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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디지털 다이아몬드”
코로나 팬데믹을 계기로 반도체 제조의 중요성에 눈을 뜬 건 일본만이 아닙니다. 세계 최대 인구 대국, 인도도 마찬가지인데요. 사실 인도는 반도체 설계 분야에선 역량이 상당한 나라입니다. 인텔, AMD 같은 글로벌 기업이 연구개발 센터를 운영 중이니까요. 전 세계 반도체 설계 인력의 20%(약 12만5000명)가 인도에 있습니다.하지만 반도체 제조에선 완전히 불모지이죠. 설계만 하고 만들지를 못합니다. 저사양 반도체를 주로 중국에서 수입해서 쓰곤 있는데, 인도와 중국은 사이가 별로 좋지 않죠. 이러다 중국이 갑자기 반도체 수출을 중단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늘 있습니다.
그래서 2021년 인도 정부가 이래선 안 되겠다, 우리도 국산 칩을 만들어야겠다면서 ‘인도 반도체 미션(ISM)’이라는 걸 출범시켰어요. 해외 반도체 기업이 인도에 제조공장을 만들면 아주 파격적으로 지원해 주기로 한 거죠. 지원이 어느 정도냐면 인도 정부가 투자비의 절반을 직접 대주고요. 주 정부가 세금 감면과 보조금으로 추가로 20~25%를 지원해 줍니다. 작정하고 마구 퍼주기로 한 건데요.
9월 열린 ‘세미콘 인디아 2025’ 행사에서 인도 모디 총리(왼쪽)가 인도에서 만든 ‘메이드 인 인디아’ 반도체 칩 시제품을 들어 보이고 있다. ISM 제공
그리고 이렇게 설립한 반도체 공장에서 최초의 ‘메이드 인 인디아’ 칩이 올해 말쯤 처음 출시될 예정이죠. 물론 저사양 반도체이지만, 그렇게 꿈꿔왔던 반도체 제조국으로 올라선다는 점에서 큰 진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인도의 나렌드라 모디 총리는 반도체를 21세기의 “디지털 다이아몬드”라고 칭합니다. 20세기에 “검은색 금”으로 불리던 석유와 맞먹는다는 뜻인데요. 그는 이렇게 강조합니다. “지난 세기는 석유가 지배했지만, 이젠 (세계 경제가) 작은 반도체 칩에 기반하고 있습니다. 전 세계는 인도와 함께 반도체의 미래를 건설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제조업에 취약한 인도가 ‘반도체 제조 허브’라는 꿈을 현실로 만들 수 있을까요.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반도체 제조에 필요한 거대한 인프라를 구축한다는 것 자체가 만만찮고요. 벌써부터 인도 국민들 사이에선 반도체 기업에 대한 보조금이 너무 과한 것 아니냐는 얘기가 나오죠.
인도는 ‘반도체 자립’이라는 꿈에 서서히 도달해 가고 있다. ISM 제공
중동에 반도체 제조 허브를?
반도체 제조국이 되려는 야망에 불타는 부자나라도 있죠. 바로 중동의 석유 부국 아랍에미리트(UAE)인데요. ‘포스트 오일 시대’를 준비 중인 UAE는 반도체 제조 거점이 되겠다며 해외 기업 유치에 열을 올리고 있습니다. 아부다비 경제개발부는 아예 홈페이지에 “반도체 기업을 유치하겠다”라고 소개하고 있을 정도죠.올봄엔 대만 TSMC가 아랍에미리트에 첨단 반도체 공장을 건립하는 방안을 논의 중이란 블룸버그 기사가 나오기도 했습니다.
‘글로벌 AI 허브’로의 도약을 노리는 아랍에미리트는 첨단 AI 반도체 칩 제조를 위한 팹을 유치하기 위해 지난해부터 TSMC와 삼성전자에 러브콜을 보내고 있다. 사진은 아부다비의 모습. 게티이미지
또 풍부한 에너지, 물류 인프라, 규제 유연성 역시 UAE가 가진 장점으로 꼽히는데요. “UAE는 대규모 장기 전력 공급이 가능하고, 세계적 수준의 항만과 공항이 있고, 신속한 의사결정이 가능하다”(미국 중동연구소의 모하메드 솔리만 선임 연구원)는 점에서 높이 평가 받죠.
물론 반도체 공정엔 깨끗한 물이 필수인데 이를 어디서 끌어오느냐(아마도 담수화?), 그리고 제조 역량을 가진 전문가를 유치할 수 있느냐(대만이나 한국에서 유치?)가 관건인데요. 결국 중요한 건 국가의 확고하고도 전폭적인 지원이 뒷받침되느냐이겠죠.
미국 시장조사업체 IDC의 마리오 모랄레스 반도체 그룹 부사장은 “이 지역에서 (반도체 제조가) 실질적인 성과를 내기까지는 10년 이상이 걸릴 것”이라면서도 긍정적인 관점을 유지합니다. “이런 것들은 개발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시간이 걸릴 뿐이죠.”
CXMT와 차이나머니의 힘
이렇게 정부가 온 힘을 다해 밀어주면 반도체 자립으로 갈 수 있을까요. 그 가능성을 보여주는 나라가 바로 중국입니다. 얼마 전인 11월 23일 중국 D램 반도체 제조기업 창신메모리테크놀로지, 약자로 CXMT가 DDR5 신제품을 내놔서 업계를 깜짝 놀라게 했는데요.DDR5는 2020년 SK하이닉스가 처음 상용화했고, 현재로선 가장 최첨단 D램입니다. 중국 CXMT는 이 전 모델인 DDR4를 주력으로 하는 곳이죠. 프리미엄급이 아닌 범용 제품을 싸게, 가성비 좋게 만들어 파는 기업이고요. 작년부터 DDR5 칩을 내놓긴 했지만, 성능 면에서 한국 제품과 차이가 컸는데요.
이번에 CXMT가 8000Mbps 속도의 초고성능 DDR5를 선보인 거예요. 갑자기 기술 격차가 사라진 거죠. 물론 수율, 즉 정상 제품 비율이 얼마나 되느냐가 관건이긴 하지만, 예상보다도 추격 속도가 훨씬 빠릅니다. 앞으로 양산 경험이 쌓이면서 기술이 성숙해진다면 상당한 위협이 될 수 있죠.
중국 창신메모리테크놀로지가 홈페이지에 공개한 최신형 DDR5 신제품 소개 이미지
여기에 알리바바, 텐센트 등 중국 주요 기업도 투자자로 참여했습니다. 한마디로 민관이 똘똘 뭉쳐서 밀어주고 있어요. 2016년 설립돼 2019년에야 처음 생산을 시작한 CXMT가 단기간 이렇게까지 올라올 수 있었던 건 이런 아낌없는 지원 덕분이죠.
D램 시장은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마이크론, 이 빅3가 94% 점유율을 기록하는 과점체제인데요. 시장 분석기관인 카운터포인트리서치에 따르면 1분기 6%인 CXMT 점유율이 올 연말이면 8%로 높아질 전망입니다(생산량 기준). 특히 1%에 불과했던 DDR5 시장 점유율이 7%로 커질 거라고 하죠. 물론 아직까진 고객이 중국 기업이긴 한데요. 그래도 꾸준히 점유율을 높여가는 데다, 첨단 제품까지 진출한다는 점에서 무시할 수만은 없습니다.
11월 23일 중국 국제 반도체 박람회장의 CXMT 부스 모습. CXMT 제공
벌써부터 CXMT 상장이 중국 상하이 증권거래소 사상 최대 규모의 IPO가 될 수 있다는 얘기가 나오죠. 성공적인 상장으로 투자금을 끌어모은다면, CXMT의 내년 5세대 고대역폭메모리 (HBM3E) 양산은 더 속도를 낼 수 있을 겁니다. 그만큼 한국 메모리 반도체 산업엔 위협요인이 될 거고요. 반도체 시장의 ‘차이나 머니’ 공습이 더 거세집니다. By.딥다이브
글로벌 분업화를 바탕으로 성장해 왔던 반도체 산업. 하지만 미·중 갈등과 코로나 팬데믹을 계기로 분업화에 대한 믿음은 깨졌고, 각 나라가 ‘부활’과 ‘자립’을 외치며 제 살길 찾기에 나서는 양상입니다. 주요 내용을 요약해 드리자면.
-반도체 제조업을 키우기 위한 쩐의 전쟁이 펼쳐지고 있습니다. 일본 정부는 대가 끊긴 미세 반도체 공정의 부활을 위해 반도체 연합군 라피더스를 2022년 출범시킨 데 이어, 2027년 두 번째 공장 착공을 최근 선언했죠. 반도체 제조를 경제 안보의 문제로 보기 때문입니다.
-반도체 제조의 불모지였던 인도도 육성에 대단히 적극적입니다. 정부 차원의 체계적인 지원 덕분에 올해 말 드디어 첫 ‘메이드 인 인디아’ 칩을 생산할 수 있게 됐죠. 20세기 석유가 ‘검은색 금’이었다면 21세기 반도체는 ‘디지털 다이아몬드’입니다.
-UAE 역시 첨단 반도체 제조공장 유치를 위해 발을 동동 구르고 있습니다. ‘중동의 반도체 제조 허브’가 되기 위한 만반의 준비가 돼 있다고 주장하는데요. 깨끗한 물과 제조 인력을 확보할 수 있느냐가 관건입니다.
-중국은 최근 창신메모리테크놀로지가 8000Mbps 최첨단 DDR5 칩을 선보이며 업계를 놀라게 했죠. 정부의 막대한 지원에 힘입어 단기간 성장한 중국 메모리 반도체 산업은 이제 IPO로 다시 한단계 도약할 전망입니다.
*이 기사는 12월 3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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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애란 기자 haru@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