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 “실패 기다리며 발목 잡기” 野 겨냥 ‘영혼 갈아넣은’ 성과 스스로 까먹는 패착 실용외교 성공의 열쇠는 국민적 공감 12·3 ‘괴물’은 독선과 남탓에서 자라나
이철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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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 대통령은 지난주 중동·아프리카 순방을 다녀와서도 “국력을 키우는 게 정말 중요하다는 생각이 다시 들었다”고 말했다. 이 대통령에게 지난 6개월은 대한민국 최고위 외교관으로서 각국의 이익이 맞부딪치는 최전선에서 국가 간 힘의 차이, 그것이 결정하는 역학관계, 나아가 국제질서의 냉혹한 현실을 온몸으로 절감하는 시간이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국력을 키워야 한다’는 거듭된 다짐이 결코 가볍지만은 않아 보인다.
이 대통령의 소회는 이렇게 이어졌다. “이 모든 힘의 원천은 국민의 단합된 힘이다. 많은 것을 두고 다투더라도 가급적 선의의 경쟁을 하고 불필요한 역량 낭비가 최소화되면 좋겠다는 생각이 절실히 들었다.” 국정 최고 책임자로서 국민적 통합을 강조하는 메시지일 테지만 한편으론 묘한 가시 같은 게 느껴졌다. 2주 전 한미 관세·안보 협상을 문서화한 공동 설명자료(팩트시트) 발표 당시의 발언을 떠올리게 했기 때문이다.
“정말 어려웠던 것은 ‘빨리 합의해라’ ‘빨리 못하는 게 무능한 거다’ ‘상대 요구를 빨리빨리 들어줘라’ 이런 취지의 압박을 내부에서 가하는 상황이 참으로 힘들었다. 국익에 반하는 합의를 강제하거나 실패하기를 기다려서 공격을 하겠다는 심사처럼 느껴지는 내부적인 부당한 압력은 없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면에서 힘센 강자와 협상을 하는데 자꾸 발목을 잡거나 왜 요구를 빨리 안 들어주느냐고 하는 것은 참 견디기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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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새 정부 6개월의 외교 성적을 놓고선 대체로 평균 이상, 특히 악조건에서도 선방했다는 평가가 많다. 임기 초 기대심리가 반영된 허니문 효과에다 바닥을 친 전임 정부의 기저효과 덕도 있다지만 후한 점수의 상당 부분은 도널드 트럼프 2기 미국 행정부를 상대로 한 새 정부의 대응, 특히 이 대통령의 인상적인 개인기에서 나왔을 것이다.
이 대통령은 8월 워싱턴 회담 직전 “한국에서의 숙청 또는 혁명” 의구심을 제기한 트럼프 대통령을 만나 귀에 쏙 박힐 칭찬을 쏟아냄으로써 팽팽하던 첫 대면의 긴장감을 일거에 누그러뜨렸다. 나아가 10월 경주 회담에선 황홀한 금관 선물을 받고 기쁨을 감추지 못하는 트럼프 대통령에게 공개적으로 ‘핵추진 잠수함 연료 공급’을 요청하는 승부수를 던져 고개를 끄덕이게 만들었다. 필요에 따라 굽히고 펼 줄 아는 능굴능신(能屈能伸)의 처세를 강렬하게 보여준 두 장면이었다. 그러니 “영혼까지 갈아 넣었다”는 자평도 허언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시작일 뿐이다. 한미 동맹과 한미일 협력을 기본 축으로 삼되 한중 관계도 안정적으로 관리하겠다는 새 정부의 실용외교는 이제야 본격적인 시험대에 올랐다. 당장 두 이웃 중일 간 갈등이 걷잡을 수 없이 첨예해지는가 하면 세계의 빅2 미중 간엔 경쟁 속 빅딜이 모색되는 미묘한 시기에 접어들었다.
실용외교는 그 용어 자체로 꽤 실용적이다. 그게 정작 뭔지 실체는 불분명하지만 넣기에 따라선 뭐든 채울 수 있는 그릇이다. 실용외교의 요체는 냉철한 현실 인식과 유연한 대응, 특히 섬세한 균형감각일 것이다. 그러나 유연성은 기회주의로, 균형감각은 줄타기로, 나아가 경박함과 비겁함으로 비난받기 쉽다. 성공을 위해 국민적 공감과 이해가 우선돼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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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이면 12·3 비상계엄 1년이다. 계엄 선포문은 민의의 전당 국회마저 ‘괴물’이 됐다고 단언했다. 그러나 국민이 목도한 것은 독선에 사로잡혀 모든 반대자를 악마화하고 스스로 ‘진짜 괴물’이 된 권력자였다. 그 씨앗은 임기 초에 이미 심어졌다. 국정 운영, 특히 대외 정책에 대한 과도한 자부심과 일방통행식 밀어붙이기 끝엔 야당에 대한 책임 전가와 적개심만 남았고, 자제력을 잃은 권력이 향한 곳은 거대한 망상과 자기 파괴의 막다른 길이었다.
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