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주현 단국대 에너지공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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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말이 있다. 한미 관세안보 팩트시트(설명자료)에 담긴 민수용 농축·재처리 절차 지지 표명은 분명한 진전이다. 원전 운영에 필요한 핵연료를 우리 스스로 생산하고(농축), 다 쓴 연료를 재활용하는(재처리) 가능성을 미국과 본격적으로 논의할 길이 열린 것이다. 이 구슬을 보배로 만드는 건 이제부터가 시작이다.
우리나라 원전 기술력에 걸맞은 자율성을 확보해야 한다는 공감대는 형성됐지만, 농축과 재처리는 핵무기 개발과 연계될 수 있는 고도의 민감 기술이다. 미국 행정부와 의회는 이전보다 더 높은 수준의 안전성, 핵투명성, 신뢰를 요구할 것이다. 결국 이번 지지 표명이 ‘원자력 주권’ 확보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주권 확보를 위해선 앞으로 넘어야 할 산이 많다.
먼저 국내 원전 정책의 정합성이 확보돼야 한다. 국내 원전 정책과 협정 개정의 논리가 충돌하면 미국을 설득할 힘이 생기지 않는다. 즉, ‘탈원전’ 기조를 유지하면서 농축·재처리를 추진하겠다는 주장은 정면으로 모순된다. 국내에서는 농축·재처리 수요가 줄어드는 상황을 만들면서, 대외적으로는 그 수요가 늘어날 것이라며 자체 수행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셈이다. 이는 우리의 진정성을 떨어뜨린다. 인공지능(AI) 시대의 전력 수요 급증에 대응하고 농축·재처리 필요성을 강조하려면 합리적인 원전 확대 정책이 선행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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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농축·재처리를 실행할 핵심 인프라를 국내에 갖춰야 한다. 협정을 개정해도 정책, 제도, 조직, 인력이 준비되지 않으면 모든 권한이 종이 위의 문구로 끝난다. 농축·재처리를 어떤 방식과 범위로 추진할지 ‘핵연료주기 정책’을 명확히 세워야 한다. 이어서 농축·재처리에 관한 안전 규제, 핵물질 방호, 안전조치 체계 등 법적 기반도 신속히 정비해야 한다. 분산된 기술 역량을 결집하기 위해 조직을 정비하고, 실제 임무를 수행할 전문 인력을 확보하는 것도 시급하다. 실제 ‘선수’와 ‘경기장’을 갖출 때 협상의 실효성도 확보된다.
이번 한미 정상회담의 민수용 농축·재처리 절차 지지는 우리가 오랜 시간 기다려 온 중요한 기회다. 정부는 먼저 농축·재처리에 관한 ‘포괄적 사전동의’를 확보하기 위한 치밀한 외교 전략을 준비해야 한다. 국내적으로는 협정 개정 논리에 부합하는 핵연료주기 정책과 계획을 정립하고 관련 법·제도·조직을 재정비하는 내실 강화도 동시에 추진해야 한다. 외교적 성과와 국내 준비가 맞물릴 때 비로소 ‘원자력 주권’이라는 보배가 완성될 것이다.
문주현 단국대 에너지공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