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 이순재 선생 추모 특별 기고
이순재 선생의 집요한 열정은 ‘배우란 무엇인가’를 실천으로 보여준 살아 있는 교과서였다. 김건표 교수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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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건표 대경대 연기예술과 교수·연극평론가
연극 ‘지평선 너머’(1956년)로 데뷔한 선생은 연극 무대와 TV 드라마에서 수많은 극 중 인물로 69년을 살았다. “무대 위 영원한 현역, 배우로서 퇴장은 없다”고 말하던 선생이 배우 인생 고희연(古稀宴)을 1년 남겨두고 드라마의 한 장면처럼 퇴장했다.
배우가 구순(九旬)을 넘어 70년 가까운 세월을 국민적 인기를 받으며 버텨낸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시트콤 ‘거침없이 하이킥’에서 ‘야동 순재’로 72세 나이에 포털사이트 검색어 1위에 올랐을 때의 일이다. 분장실에서 선생은 허스키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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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손한 답이었지만, ‘시청률 순재’인 그에게는 드라마 역사상 최고 시청률을 기록한 출연작이 많다. 대발이 아빠로 불리던 주말연속극 ‘사랑이 뭐길래’는 최고 시청률 64.9%인 국민 드라마였고, 목욕탕집 주인 김복만을 연기한 ‘목욕탕집 남자들’은 50%가 넘었다. 사극 ‘허준’이 기록한 최고 시청률 64.8%도 갈아치울 수 없는 기록으로 남아 있다. 팔순에는 ‘꽃보다 할배’에 출연하며 ‘할배 예능 시대’를 열었고, 시청자들은 ‘직진 순재’에 열광했다.
배우가 출연한 작품이 대박을 치는 데는 운도 따라야 하지만, 선생의 연기 인생 70년 동안 시청률을 갈아치운 작품들이 수없이 많다는 건 ‘우연’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일이다. 그는 묵묵히 극 중 인물을 창조해내는 역할에 충실했다.
데뷔 60주년 기념 공연 ‘세일즈맨의 죽음’을 준비할 때 일이다. 윌리 로먼 역을 1978년부터 여러 차례 공연했음에도, 신인 배우처럼 대본을 읽고 또 읽으며 연습하기에 이유를 물어봤다.
“대본을 볼수록 1940년대 미국의 시대 배경과 로먼의 죽음이 새롭게 느껴져. 배우의 공부는 끝이 없는 거야. 대본을 볼 때마다 연기가 달라지니 손에서 놓을 수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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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이순재표 ‘리어왕’을 창조했을 때 그의 나이는 87세. 그 많은 대사를 어떻게 암기하느냐 묻자, 선생은 “통계자료와 한미 대통령들의 이름, 미국사를 외워보며 매일 아침 기억력을 테스트한다”고 했다.
선생과의 대화는 역사, 문학, 철학, 정치, 연극 분야를 넘나드는 강의를 듣는 듯했다. 그의 해박한 지식에 놀라지 않은 적이 없다. 후배들이 그를 존경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인기에 연연하지 말 것, 무대에서 끊임없이 공부하는 배우가 될 것, 그것을 퇴장하는 날까지 실천할 것.
선생은 하늘에서도 신인 배우처럼 대본을 들고 있을 ‘영원한 국민 할배’이며, 연극 ‘리어왕’과 ‘세일즈맨의 죽음’을 연습하실 분이다. 데뷔 60주년 공연 ‘세일즈맨의 죽음’ 무대에서 남긴 마지막 말, 여기에 그의 인생이 담겨 있다.
“세월 가는 걸 세어보지도 않았어요. 벌써 나이는 80세가 되고, 배우를 시작한 지도 60년이지만, 그런 거 묻지도 따지지도 않습니다. 그런 건 의미가 없으니까. 그저 배우로 한결같이 달려온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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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건표 대경대 연기예술과 교수·연극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