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 배웠으니 더 해야 한다는 생각에 밤낮없이 일해”… “기부는 ‘빚’ 갚는 일”
‘강원도 기부왕’으로 불리는 임기수 한국타이어춘천판매 회장(왼쪽)과 그가 받은 표창장. 지호영 기자
구멍 난 타이어 이어 붙여 팔아 ‘대박’
임 회장은 ‘강원도 기부왕’으로 불린다. 그동안 사랑의열매 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 기부한 돈만 4억 원. 춘천고와 강원대 학생들에게는 2010년부터 매년 500만 원씩 장학금을 지급하고 있다. 또 46년간 한국타이어 춘천대리점 개점일인 10월 30일이 되면 매년 지역의 어려운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줬다. 1970년대부터 기부를 시작한 임 회장의 전체 기부 금액은 어림잡아 15억 원이 넘는다.
임 회장은 1940년 충남 연기군 남면 양화리에서 4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초등학생 때 반에서 3등 정도 할 만큼 공부를 잘했지만 아버지 뜻에 따라 중학교를 못 갔다. 친구 중 절반 정도가 중학교에 입학했다. 친구들은 “우리가 수업료 보태줄 테니 중학교에 같이 가자”고 했고, 유진하 담임교사는 중학교 입학원서를 대신 사다 주며 아버지를 설득해보라고 권했다. 그런데 그때 옆에 있던 교감이 담임교사에게 “(중학교) 안 간다는 애 입학원서는 왜 사왔냐”며 핀잔을 줬다. 그 말이 아직도 원망스럽고 가슴에 사무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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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에 와 처음 한 일이 타이어 펑크 때우는 일이었다. 추운 겨울밤 타이어를 만지고 있으면 손이 트고 찢어져 피가 줄줄 흘렀다. 임 회장은 춘천에서 맞은 첫 겨울을 회상하며 이렇게 말했다.
“튼 상처에 ‘구루무(크림)’도 못 바르고 ‘구리스(자동차 기름)’를 바르고 잤어요.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요. 내가 남들보다 못 배웠으니까 더 열심히 해야 한다는 생각에 밤낮없이, 일요일도 없이 일했죠.”
“사람 됨됨이가 좋으면 하늘이 안다”는 임 회장의 말이 사실인 걸까. 18세가 되던 해 동업 제안이 들어와 춘천 시외버스터미널에 타이어 가게를 갖게 됐다. 임 회장은 펑크 난 타이어 2개를 이어 붙여 만든 ‘해방 타이어’를 개발해 돈을 쓸어 담았다. 19세부터 3년 동안 고향에 있는 약 3000㎡(900평)짜리 땅을 3번이나 샀다.
“그때는 비포장도로니까 하루에도 두세 번씩 타이어에 구멍이 났어요. 버려진 타이어는 10원도 안 주고 그냥 가져올 수 있었고, 해방 타이어는 만드는 족족 팔렸어요. 낫으로 고무를 매끈하게 깎아서 이어 붙이면 완성이에요. 이걸로 타이어 부족 문제에서 해방됐으니 ‘해방 타이어’라고 이름 붙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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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시외버스터미널에서 생선을 팔던 노점상 아들에게 10만 원을 준 것이 기부의 시작이었다. 서울대에 합격했다기에 학비에 보태 쓰라고 줬다. 임 회장은 현재 강원대에 다니는 외국인 학생들의 학비도 지원하고 있다. 그는 외국인 학생에게 장학금을 줄 때마다 “공부 열심히 배워서 네 나라로 돌아가 ‘코리안 최고’라고 얘기하라”고 당부한다.
임 회장은 “어려울 때마다 주변에서 도와줬다”며 “그 빚 갚으려 기부한다”고 말한다. 1979년 한국타이어 춘천대리점을 맡게 됐는데, 바로 다음 해 거래처가 망해 5400만 원짜리 어음이 부도가 났다. 이때 한국타이어 본사가 임 회장이 지불해야 할 1억1000만 원을 이자 없이 매달 1000만 원씩 나눠 갚을 수 있게 해줬다. 거래처들은 임 회장을 돕겠다며 500만 원만 내주던 어음을 1000만 원씩 끊어줬다.
임 회장은 요즘도 가게에 나와 일한다. 인하대 기계과를 나와 가게를 물려받은 아들이 타이어 만지는 모습을 보면 못마땅하다. “나는 눈 감고도 빠르고 쉽게 하는 걸 답답하게 일한다”는 이유에서다. 임 회장은 “아들이 암만 잘해도 아직 내 실력은 못 따라온다”고 말했다.
딸 넷, 아들 하나 모두 대학에 보내 “부모 속 안 썩이고 잘 독립한 자식”으로 키운 건 자랑거리다. “자식에게 돈 주면 자식 망가뜨린다”는 신념으로 결혼 자금도 보태주지 않았지만 다들 제 짝과 잘 산다. 45년 넘게 기부를 이어올 수 있는 이유를 묻자 임 회장은 이렇게 답했다.
“기부하면 즐거워요. 살면서 즐거운 게 제일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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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는 주간동아 1515호에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