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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드파더스라는 단체가 양육비를 주지 않는 부모의 얼굴과 이름, 주소를 공개했을 때 사회적 공분이 일었다. 양육비 미지급 실태를 알리는 공익 제보라는 명분이었지만, 사이트 운영자가 일부 부모의 명예를 훼손한 혐의로 재판을 받게 됐다. 1심은 “공공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며 무죄를 선고했지만, 2심은 “공공의 이익보다 비방의 목적이 인정된다”며 유죄로 판단을 뒤집었다. 대법원도 이를 확정했다. 사실을 말했는데도 죄가 되는 형법상 ‘사실 적시 명예훼손’ 논란을 촉발한 대표적 사례다.
▷폐지론자들은 “사실을 말하는 게 왜 형사처벌 대상이 되느냐”고 묻는다. 다른 사람의 범죄나 잘못을 고발하는 활동까지 형사범죄로 취급하면 개인의 자유를 지나치게 침해할 수 있다. 도둑질을 해놓고, 알려지지 않은 덕에 유지되는 명예를 보호할 가치가 있느냐는 물음도 이어진다. “진실이 드러나 훼손될 명예는 보호할 가치가 없다”는 주장도 나온다. 1953년 제정 이후 달라진 게 없는 이 조항을 손질할 때라는 것이다.
▷반대로 내 표현의 자유만큼 다른 사람의 명예도 중요하다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더욱이 악성 댓글과 무차별 비난에 시달리는 이들에게 명예훼손죄의 존재는 ‘마지막 보루’라는 호소가 나온다. “이것마저 없으면 아무런 방어 수단이 없다”는 것이다. 사실에 근거한 비판이라도 개인의 사회적 평가와 인격을 무너뜨릴 수 있는 만큼, 타인의 명예를 보호할 장치는 필요하다고 말한다. 명예훼손 표현의 전파 속도와 파급력은 온라인 시대에 훨씬 더 커졌다. 민사소송만으로 충분한 보상이 어렵다는 견해도 많다. 2021년 헌법재판소가 5 대 4로 사실 적시에 따른 명예훼손 조항을 합헌이라고 본 배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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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 대통령이 11일 ‘사실 적시 명예훼손죄 폐지’ 검토를 지시하면서 오래된 논쟁이 다시 불붙었다. “형사가 아니라 민사로 해결할 일”이라고도 했다. 실제로 이를 형사처벌까지 하는 나라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한국과 일본 정도다. 미국 영국 등 대부분 국가는 민사소송을 통해 손해배상 책임을 묻는다. 억울한 피해를 어떻게든 알리려는 사람들에게는 말할 통로를 열어 두되, 누군가를 사회적으로 매장시키려는 행위에는 실효성 있는 억제책을 고민할 필요가 있다.
장관석 논설위원 jk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