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트렌드 생활정보 International edition 매체

K팝의 궤적… 따라가보면 그가 나온다

입력 | 2025-11-12 03:00:00

‘기획의 감각’ 출간한 정병기 모드하우스 대표
20여년간 K팝 기획자로 활동… 아티스트 발굴-기획 노하우 담아
친근한 소녀 표방한 ‘트리플에스’… ‘세계관 창조’ 철학 응축된 결과물
“좋은 기획자? ‘훈련된 감각’ 중요”




신간 ‘기획의 감각’에서 20여 년간 K팝 기획자로 쌓은 경험을 풀어놓은 정병기 모드하우스 대표. 모드하우스 제공

“K팝 기획을 거창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이를테면, 데이트 코스를 잘 짜는 사람이 좋은 기획자가 될 가능성도 큽니다. 일상의 사소한 계획부터 짜보는 것, 그게 기획자가 되는 첫 단추가 될 겁니다.”

정병기 모드하우스 대표가 기획에 참여한 K팝 아이돌 ‘원더걸스’. JYP 제공

정병기 모드하우스 대표가 기획에 참여한 K팝 아이돌 ‘인피니트’. 인피니트 컴퍼니 제공

20여 년 K팝 기획자로 살아온 정병기 모드하우스 대표(46)는 4일 서울 강남구 사무실에서 만나 ‘좋은 기획자의 자질’을 이렇게 설명했다. 국내 1세대 A&R(Artist & Repertoire·음악의 전반적 기획) 프로듀서로 꼽히는 그는 아이돌 ‘원더걸스’ ‘2PM’ ‘러블리즈’ ‘이달의 소녀’ 등의 기획에 참여했다. 2021년 모드하우스를 설립한 뒤엔 24인조 걸그룹 ‘트리플에스(TripleS)’를 2023년 선보였다.

정 대표는 지난달 자신의 첫 책 ‘기획의 감각’(21세기북스)을 출간했다. 시장 분석과 콘셉트 설정, 팬덤 구조, 리스크 관리 등 K팝 현장에서 체득한 노하우와 철학을 담았다. 그는 “대중 콘텐츠를 만드는 기획자로서의 경험을 공유하고 싶었다”고 했다.

A&R은 주로 곡 선정에 관여한다고 알려져 있지만, 실은 아티스트 발굴부터 음반 기획 및 관리까지 거의 모든 분야를 망라한다. 정 대표는 이를 “아티스트의 세계관과 콘셉트를 설계하고, 음악·비주얼·무대의 방향성을 통합적으로 조율한다”고 정의했다. 아이돌이 하나의 세계라면, 이를 창조하는 설계자이자 디자이너인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 A&R 프로듀서는 현재 K팝에서 더욱 역할이 중요해졌다. 과거엔 노래를 히트시키느냐가 중요했다면, 지금은 뮤지션의 전체적인 세계관이나 콘셉트를 어떻게 이끌어 가느냐가 관건이기 때문이다.

정병기 모드하우스 대표가 기획에 참여한 K팝 아이돌 ‘2PM’. JYP 제공

정 대표가 2PM을 ‘짐승돌’이란 콘셉트로 만든 것도 이런 맥락이다. 그는 2000년대 후반 보이그룹들을 서울의 주요 거리와 비교하며 연구했다. “샤이니에선 압구정의 세련됨, 빅뱅에선 홍대의 자유분방함, 슈퍼주니어에선 강남역의 트렌디함을 느꼈다”고 한다. 이를 바탕으로 2PM은 ‘세련되고, 놀 줄 아는 코엑스몰의 젊은 남성’ 느낌으로 차별화한 게 짐승돌로 이어졌다.

정병기 모드하우스 대표가 기획한 24인조 걸그룹 ‘트리플에스’. 모드하우스 제공 

걸그룹 트리플에스는 이런 그의 철학이 가장 잘 응축된 결과물이다. 앞서 프로듀싱한 12인조 걸그룹 ‘이달의 소녀’가 잘 짜인 판타지 게임 같은 세계관을 갖췄다면, 트리플에스는 우리 주변에 살고 있는 ‘친근한 소녀들’이라는 서사를 표방했다.

“또래 여성들이 ‘나도 저 팀에 들어갈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할 정도로 허들을 낮추고 싶었어요. 또 ‘멤버 조합의 다양성’을 보여주고, 팬들끼리 서로 디지털 포토카드를 교환하며 커뮤니티를 만들려면 8명이나 12명은 적고, 24명이 가장 적절한 숫자였죠.”

워낙 인원이 많다 보니 활동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콘셉트 덕에 탄탄한 코어 팬덤이 형성됐다. 트리플에스 팬들은 디지털 포토카드를 사면 타이틀곡 선정이나 유닛 조합 등 주요 의사 결정에 참여할 수 있다. 그룹 멤버들은 이렇게 팔린 포토카드의 수익을 정산받는다. 정 대표는 “이젠 무대에 설 수 있다는 것만으론 동기 부여가 되지 않는다”며 “아티스트를 응원하는 팬심이 실제로 반영되는 ‘선순환 구조’를 만들고 싶었다”고 했다.

정 대표처럼 K팝 기획자를 꿈꾸는 이들은 뭘 갖춰야 할까. 그는 “재능이 아닌 ‘훈련된 감각’의 결과가 중요하다”고 했다.

“좋은 기획은 ‘번쩍’하고 떠오르지 않아요. 없어도, 늘 찾아보는 거죠. 수많은 콘텐츠를 보고 듣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아야 합니다. 미 뉴욕타임스(NYT) 100대 소설이나 영국 음악잡지 NME 100대 앨범 등을 꾸준히 읽고 듣는 ‘목표 지향적 소비’도 좋은 방법이에요.”

정 대표는 “K팝 기획자로 오래 활동한 만큼 책임감도 크다”며 “아이돌 정산 시스템 등 관행으로 여겨졌던 부분도 다시 고민해야 할 시기다. 달라진 시대의 눈높이를 따라가야 한다”고 했다.



사지원 기자 4g1@donga.com



트랜드뉴스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