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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수 있다는 마음이 내 눈입니다

입력 | 2025-11-07 03:00:00

시각장애 애널리스트 신순규 씨, 3번째 에세이집 ‘할 수 있다 생각하고…’ 펴내
9세때 시력 잃고 피아노 배워… 美공연서 미국인 부모 만나 유학
하버드대서 공부, CFA도 따내… “연애 빼고는 기죽어 본 적 없어
처음엔 ‘할 수 있는’ 걸 찾았지만… 나중엔 재밌어 보이는걸 택했죠”




미국 월가의 31년 차 애널리스트인 신순규 씨(58)가 대학에 입학할 때 일이다. 어머니는 독립하는 아들을 위해 옷걸이마다 점자를 붙여주셨다. ‘노란색’ ‘파란색’ 등 옷걸이마다 색깔을 표시했다. 시각장애인인 아들이 누구에게 의존하지 않고 옷을 입을 수 있도록. 아들은 40년 가까이 된 그 옷걸이들을 지금도 간직하고 있다.

“근데 엄마랑 저도 생각을 못 했던 게, 옷을 벗으면 똑같은 옷걸이에 걸어야 한다는 거예요. 까먹고 딴 데 걸어놓으면 다 꽝이 되는 거죠, 하하.”

미국 월가에서 일하는 시각장애인 애널리스트 신순규 씨. 전영한 기자 scoopjyh@donga.com

1967년 서울에서 태어난 신 씨는 9세 때 시력을 잃었다. 어머니 권유로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고, 순회 공연차 방문했던 미국에서 자신을 맡아주겠다는 ‘미국인 부모’를 만나 15세에 유학을 떠났다. ‘점자 옷걸이’를 만들어주신 건 미국 어머니였다.

부모의 사랑은 좋은 결실을 맺었다. 신 씨는 하버드대에서 심리학을 전공한 뒤 월가 투자은행 JP모건에 입사했다. 시각장애인 최초로 공인재무분석사(CFA)도 취득했다. 현재 세계적인 투자사 ‘브라운 브러더스 해리먼’에서 이사(직함은 ‘vice-president’)로 재직하고 있다.

최근 세 번째 에세이 ‘할 수 있다 생각하고 방법을 찾아봅시다’(판미동)를 낸 신 씨를 5일 서울 용산구의 한 호텔 라운지에서 만났다. 전작 에세이 ‘눈 감으면 보이는 것들’(2015년)과 ‘어둠 속에 빛나는 것들’(2021년)도 각각 국내에서 2만 부, 1만 부가 팔렸다.

무척 달변가인 그는 인터뷰 내내 정치와 경제는 물론이고 자녀 양육까지 다양한 주제를 넘나들었다. “한국 올 때마다 공항에 팬이 가득하다”며 천연스러운 농담도 곁들였다.

신 씨가 역경을 이겨낸 비결은 뭘까. 그의 성장 과정엔 ‘장애인이니까 기대를 낮춰야 한다’는 전제가 없었다. 스물네 살 딸과 스무 살 아들은 “아빠가 시력이 없어서 이 정도지, 아니면 수백만 명이 따르는 교주나 나라를 쥐락펴락하는 정치인이 됐을 것”이라고 한단다.

“미국 어머니는 저에게 사람들과 얘기할 때 우물우물하지 말고 똑바로 말하라고 하셨어요. 영어를 할 때도 외국인이 아니라 현지인과 똑같이 말하는 걸 강조하셨죠. 대학 갈 즈음엔 사람들이 저를 원어민인 줄 알았어요.”

수재들이 모인다는 하버드대에서 움츠러들진 않았을까. 그는 “연애하는 것 빼고는 기죽어 본 적이 별로 없다”며 “항상 나 자신과 싸웠기 때문에 남과 비교해 의기소침해지진 않았다. 제가 할 수 있는 게 100인데 80밖에 못 할 때 속상했다”고 말했다.

“처음엔 저도 시각장애인이니까 직업이나 전공도 ‘할 수 있는’ 걸 우선 찾았죠.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제가 할 수 있는 게 그리 제한적이지 않다는 걸 깨달았어요. 직업도 전공과 상관없는 걸 갖게 됐잖아요. 전 그냥 제게 재미있어 보이는 걸 선택했을 뿐이에요.”

이제 신 씨는 자기처럼 다른 이들에게도 날개를 달아주려 노력하고 있다. 보육원 아이들을 돕는 비영리 단체 ‘야나 미니스트리(YANA Ministry)’를 설립했으며, 유학 프로그램으로 지금까지 10명의 학생을 미국 가정과 연결했다.

“미국 부모님도 저를 입양한 것도 아닌데, 그냥 자식처럼 키워주신 거거든요. 저는 그 스토리를 되풀이하고 싶었어요. 저희 딸 예진이도 12세 때 한국에서 데리고 왔어요. 예진이도 대학 갈 즈음엔 외국에서 자란 티가 안 날 정도로 영어를 잘했죠.”

앞으로는 “글을 더 자주 쓰고, 책도 꾸준히 내고, 강의 활동도 하고 싶다”는 신 씨. 자신이 외치는 한마디가 누군가에게 분명 도움이 되리라는 확신 때문이다.

“출판사에도 얘기했거든요. ‘1년에 한 권씩 낼까요?’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방법을 찾아봐야죠.”



김소민 기자 somi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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