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6일 찾은 울산 울주군 반구대 암각화의 모습. 울산=김도형 기자 dodo@donga.com
“한나라당 대표 시절 여러 국회의원과 함께 반구대 암각화 보존 상황을 살펴보려고 현장에 간 적이 있습니다. 얼어 있는 대곡천을 건너서 암각화를 보고 돌아오다가 얼음이 깨지는 바람에 그만 물에 빠졌습니다.”
지난달 29일 오전 서울 종로구 아산정책연구원 1층 강당. 울산 울주군 ‘반구천의 암각화’가 올 7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것을 기념하는 특강 행사의 무대에 오른 정몽준 아산사회복지재단 이사장이 2010년 겨울의 에피소드를 꺼냈다.
울산 동구와 서울 동작구를 지역구로 활발하게 정치 활동을 펼치던 시절. 정 이사장은 아직 일반인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던 반구대 암각화의 가치를 먼저 깨닫고, 스페인 알타미라 동굴 벽화보다 더 가치 있는 유물이라고 알리는 홍보 대사를 자처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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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 주변 얼음을 붙잡고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었던 그날의 일에 대해 정 이사장이 “옷은 전부 젖었지만, 생명은 건졌다”라고 말하며 미소를 짓자, 강당을 가득 메운 청중들 사이에서도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날 정 이사장은 “반구대 암각화는 단 하나밖에 없는 세계적인 문화유산으로 울산이나 우리나라만의 것이 아닌 인류 전체의 소중한 재산”이라며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면서 정부가 2030년까지 대책을 마련하기로 한 것은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고, 차질 없이 보존 대책을 추진해 주기를 바란다”고 강조했다.
정몽준 아산사회복지재단 이사장이 한나라당 대표이던 2010년 2월 반구대 암각화를 찾았다가 물에 빠진 모습을 포착한 사진과 이를 보도한 동아일보 기사. 동아일보DB
● 정몽준·김영명 이사장 부부가 앞장서서 보존 활동
유네스코는 올 7월 울산 울주군에 자리 잡은 ‘울주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와 ‘울주 천전리 명문과 암각화’를 아우르는 ‘반구천의 암각화’를 세계유산에 등재했다. 세계에서 가장 사실적인 고래사냥 그림이 담긴 이 국보를 선사 시대를 대표하는 창의적 걸작으로 인정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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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암각화의 가치를 일찌감치 알아본 정 이사장은 2010년의 일화가 보여주는 것처럼 적극적으로 암각화 보존 운동을 펼쳐왔다.
그러면서 정 이사장의 부인인 김영명 예올 이사장도 자연스레 반구대 살리기 운동에 팔을 걷어붙였다.
예올은 김 이사장이 직접 외국 손님들을 안내하면서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던 문화재 안내판을 보다 아름답게 가꾸어 보자는 생각에서 2002년 세운 비영리 재단법인이다. 이후 예올은 울산 반구대 암각화 보존 활동은 물론 문화재 안내판 개선사업과 사직단 역사성 회복운동, 전통공예 후원, 전통문화 관련 교육 등 다양한 활동을 펼치면서 한국의 문화유산을 지켜내고 있다.
이날 정 이사장 다음으로 무대에 오른 김 이사장은 “예올이 처음 암각화를 마주했을 때는 도로가 제대로 만들어지기 전이었다”며 “원시적인 느낌의 흙길을 지나 거대한 절벽 위에 새겨진 수천 년 전 선사인이 만들어놓은 너무 아름다운 작품을 그대로 보존하기 위해 나름의 노력을 기울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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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이사장의 이런 혜안은 반구대 암각화 주변의 자연환경이 잘 보존돼 있다는 평가가 세계유산 등재 과정에서 높이 평가 받으면서 실제로 빛을 발했다. 암각화가 수시로 물에 잠기는 열악한 처지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주변 환경이나마 잘 보존한 것은 세계유산 등재에 중대한 역할을 했다는 평가다.
지난달 26일 울산암각화박물관에서 반구대 암각화를 향해 가는 길 주변의 모습. 숲과 바위, 강이 어우러진 자연환경이 그대로 드러나는 풍경이다. 울산=김도형 기자 dodo@donga.com
● “전 세계에서 가장 탁월한 예술성 지닌 암각화”
이처럼 지난한 과정을 거쳐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암각화의 가치를 조명하는 작은 잔치로 예올이 준비한 이날 행사의 특강자로는 김호석 전 한국전통문화대 교수가 나섰다.
국내에서 손꼽히는 수묵화가로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의 초상화를 그리기도 한 김 전 교수는 러시아와 몽골을 비롯한 세계 곳곳의 암각화를 80차례 이상 답사한 암각화 전문가다.
이날 김 전 교수는 “반구대 암각화의 미감은 ‘사실성’이 기본”이라며 “왜곡이 많지 않고 환상적인 그림도 별로 없다”고 설명했다. 해외 암각화의 경우 동물 등의 모습을 과장해서 그리는 경우가 많은데 반구대 암각화는 대부분 사실 그대로 정직하게 그렸다는 것이다.
예컨대, 반구대 암각화에 그려진 고래의 경우 고래의 종까지 파악할 수 있을 정도로 정확하게 묘사돼 있다. 또 가장 유명한 고래 그림의 경우 어미 고래가 새끼 고래를 데리고 다니는 모습을 담고 있다.
김 전 교수는 “새끼 고래를 데리고 다니는 그림은 어미 고래의 음각 속에 양각으로 새끼 고래를 그린 매우 선진적인 암각 기법”이라며 “심지어 고래를 사냥할 때 창이 고래의 몸으로 들어가는 과정까지 묘사하면서 세계 어디에서도 발견된 적이 없는 사실성을 보여주고 있다”고 말했다.
반구대 암각화의 그림 가운데 가장 유명한 고래 그림이 울산암각화박물관에 조형물로 새롭게 만들어져 있는 모습. 어미 고래가 새끼 고래가 숨을 잘 쉴 수 있도록 등에 업고 다니는 모습을 그린 것으로 보는 견해가 많다. 울산=김도형 기자 dodo@donga.com
김 전 교수는 반구대 암각화 전체를 아우르는 특징에 대해서는 ‘유목의 기억을 가진 정착 집단의 표현물’이라고 정의했다.
반구대 암각화에는 유목민족이 수렵 장면을 묘사할 때 빠지지 않는 개를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정착민족의 그림이라고 볼 수 있는 여러 이유 가운데 하나다.
그런데 반구대 암각화에는 유목민족의 암각화에서 볼 수 있는 동물의 앞다리와 뒷다리를 묶어 놓은 그림이 관찰된다. 결국 울주군 일대에 이미 정착해서 살고 있던 선사 민족이 유목의 기억도 반구대 암각화에 함께 남긴 것으로 봐야 한다는 게 김 전 교수의 설명이다.
반구대 암각화는 해외 유수의 암각화와 달리 그림이 흩어지지 않고 중심 암면에 집중돼 있다는 것도 중요한 특징이다. 김 교수는 이런 여러 특징을 고려하면 반구대 암각화가 그려진 곳이 당시 정착민에게 일종의 성소(聖所)였던 것으로 보고 있다.
그는 “반구대 암각화는 대부분 남동향 암면에 그려진 다른 암각화와 달리 정북향인데 이는 세계적으로 거의 유일한 사례”라며 “암면 아래와 주변의 공룡 발자국까지 포함하는 전반적인 발굴 조사와 연구가 필요한, 한반도에서 가장 오래된 ‘문명사적 연구 과제’”라고 밝혔다.
지난달 26일 반구대 암각화의 중심 암면을 디지털 망원경으로 비춰본 모습. 울산=김도형 기자 dodo@donga.com
● 올 7월에도 침수… 2029년쯤 문제 해결 기대
사연댐 문제가 아직 해결되지 않으면서 반구대 암각화는 세계유산 등재 직후인 올 7월 하순에도 폭우로 또다시 물에 잠겼다. 반구대 암각화가 침수된 건 2023년 8월 이후 약 2년 만의 일. 암각화는 최근 10년 동안 연평균 38일씩 물속에 잠기는 신세를 면하지 못하고 있다.
울산시 등은 사연댐의 수위를 조절할 수 있는 수문 3개를 설치해 이런 일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할 방침인데 예상 완공 시점은 2029년 말이다.
20여 년 동안 반구대 보존 운동을 펼치면서 ‘해보지 않은 일이 없다’고 하는 변영섭 전 문화재청장은 “문화재청장 시절 박근혜 전 대통령의 뜻까지 등에 업고 침수 문제를 해결하려 했지만, 이해관계가 얽힌 지역 정치권의 막무가내 같은 반대를 결국 넘어서지 못했다”며 “세계유산 등재를 계기로 겨우 해결을 기대하고 있는 지금의 상황은 문화와 문화유산에 대한 의식과 이해가 아직은 크게 부족한 한국의 현실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K-컬쳐’가 세계적으로 큰 관심을 받는 상황임에도 그 뿌리가 되는 자산인 국가 유산은 정작 관리, 보호도 제대로 되지 않고 있어 안타깝다는 것이다.
변 전 청장은 “수천 년 전의 선조가 남겨놓은 반구대 암각화에서는 인간이 이해력과 상상력을 바탕으로 만들어낸 독보적인 창의력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며 “암각화를 비롯한 값진 문화유산을 통해 문화와 문화의 가치에 대한 이해를 넓혀가는 것이 문화강국, 문화대국으로 가는 길이라는 사실에 눈뜨는 분들이 많아지길 기대한다”고 밝혔다.
한편, 울산시는 지난달 말부터 12월 28일까지 ‘반구천의 암각화’를 오가는 무료 셔틀버스를 운영하고 있다. 운행 시간은 오전 9시 30분부터 오후 6시 30분까지이고 울산암각화박물관 휴관일인 월요일은 운행하지 않는다.
평일에는 25인승 중형버스 1대, 주말과 휴일에는 중형버스 2대를 각각 활용해 1일 8회씩 왕복한다.
1코스(반구대암각화 방면)는 반구대암각화 공영주차장에서 출발해 반구대안길 공중화장실까지, 2코스(천전리 명문과 암각화 방면)는 반구대암각화 공영주차장에서 출발해 천전리 명문과 암각화 입구까지 각각 왕복한다.
지난달 26일 반구대 암각화 전망대에서 바라본 암각화와 그 주변의 모습. 전망대에서는 망원경을 통해 암각화를 살펴볼 수 있다. 울산=김도형 기자 dodo@donga.com
김도형 기자 dod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