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려다보니 물이었다. 사방이 땅으로 둘러싸인 충청북도. 그곳 제천(堤川)에서 이런 광경을 볼 줄은 몰랐다. 남한강이 허리를 감아 돌긴 하지만 지금 산들은 물을 품고 있다. 태아를 감싼 양수처럼 아늑하게. 놀랐던 까닭은 제천의 한자어 뜻을 헤아리지 않았던 탓일 수 있다. 풀이하면 물가에 쌓은 방죽. 1000년도 더 옛날에 만든 저수지 의림지(義林池)에서 비롯된 말이라고 하는데, 제천 전체가 넉넉한 물을 담고 있는 큰 둑인 양하다.
제천 청풍면 비봉산 정상 하늘전망대에서 내려다본 청풍호 남쪽. 물 건너 악어섬, 그 너머 황학산, 월악산이 겹쳐져 보인다.
1985년 준공된 충주댐은 제천을 비롯해 충주, 단양 많은 마을을 물속에 담고 있다. 제천 청풍면은 27개 마을 가운데 25곳이 잠겼다. 그렇게 생긴 거대한 인공호수 충주호를 제천에서 청풍호라고 부르는 까닭이기도 하다(정원선, ‘제천, 스물두 개의 아스피린’, 해토, 2015).
하늘전망대에서 바라본 청풍호 북쪽. 물 너머 작성산 동산 금수산 소백산 등이 펼쳐진다.
땅은 비봉산 남동쪽 옥순봉로 앞까지 물을 끌어들였다. 담긴 물 모양이 한반도를 연상케 한다.
비봉산 하늘전망대까지 연결되는 청풍호반 케이블카.
● 여전한 삶의 공간
추사 김정희(1786~1856)가 가을 의림지를 읊은 시 일부다. ‘가을 산’의 산은 제천 진산(鎭山) 용두산을 가리킨다. 의림지는 샘이 솟는 용두산 자락 물길을 막아 만들었다. 청풍호 물이 가슴을 탁 틔우는 호방한 맛이 있다면, 의림지 물은 심지를 굳게 하는 의연한 멋이 있다.
의림지 가운데 순주섬이 물그릇에 띄운 티라이트(tealight) 양초처럼 드러난다. 나물로 무쳐 먹는 순채(蓴菜)가 많이 난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란다. 저수지 둘레로 적게는 100년, 많게는 500년 넘은 소나무들이 호위하듯 서 있다. 사이사이 수양버들도 합을 이룬다.
지금도 논에 물을 대고 있는 의림지. 가운데 순주섬에서는 제천 사람들이 나물 무쳐 먹는 순채가 난다.
의림지는 제천 사람이 아닌 사람에게는 교과서를 통해 더 친숙하다. 하지만 삼국 시대 다른 두 저수지 김제 벽골제와 밀양 수산제가 물 마른 유적지에 그친다면, 의림지는 아래쪽 청전(靑田)뜰 논 약 200ha(약 60만 평)에 지금도 물을 댄다. 인간 삶에 한 발 걸치고 있는 셈이다. 풍류를 즐기는 장소만이 아닌 생활 공간이기도 한 이유다.
약선(藥膳) 재료를 활용한 음식과 그윽한 커피를 마시며 미음완보할 수 있는 의림지 가스트로 투어 코스의 솔밭.
의림지 역사박물관에 조성된 겨울 의림지 풍경. 썰매와 스케이트를 지치고 빙어를 낚았다.
● 물은 물고기를 바라고
제천은 해발고도가 300m를 넘나드는 데다 태백 소백 차령산맥으로 둘러싸인 산악 분지 지형이다(‘제천의 문학과 문학지리’). 따라서 외부와의 교류가 적은, 후미지고 으슥한 산골이 곳곳에 있다. 가톨릭 성지인 배론성지도 그런 곳이다.
배론성지 예수 그리스도상 앞 연못.
단정한 잔디밭 너머로 노아의 방주를 연상케 하는 최양업 신부 기념 성당이 보이고 연못과 십자가의 길이 나타난다. 성당 가는 길 왼편 잔디밭 끄트머리에 아기 예수를 안은 성모 마리아 석상이 놓여 있다. 멀리서 바라만 보는데도 차분해진다.
배론이라는 이름은 산에서 길게 뻗어 내려온 골짜기 모양이 배 밑바닥 같다고 해서 붙었다고 한다. 다만 ‘론’의 한자(論 혹은 淪)에 그런 뜻이 있는지 충분한 설명을 찾기는 어렵다.
배론성지 아기 예수를 안은 성모상이 찾아온 사람들을 맞는다. 보기만 해도 차분해진다.
금수산 신선봉 능선에 자리한 정방사. 거대한 암벽 의상대 아래 선 해수관음상이 저 멀리 청풍호를 내려다본다. 관음보살은 자신의 깨달음을 늦추면서까지 중생의 고통과 신음을 듣고 자비로 구제한다.
정방사 원통보전과 다른 전각 사이로 산들이 중첩해 펼쳐진다. 처마에 매달린 풍경, 그 밑 물고기가 자신을 들여다보라고 속삭인다.
않는 물고기처럼 항상 깨어 있으라는 뜻이다. 쉼 없이 나 자신을 들여다보라는 말이다. 그러면 구원의 실마리가 보일 수 있을지 모른다. 띵~ 띵~ 풍경 소리를 뒤로한다. 욕망으로 요동치던 마음의 수면이 순간 잔잔해진다.
금수산 자락 국립제천치유의 숲에서 시선을 산들로 향한다. 향기, 경관, 피톤치드 등이 오감을 자극하며 몸을 새롭게 한다. 이곳 산초나무잎을 따서 양쪽 눈밑에 붙이면 모기가 달려들지 못한다. 생강나무잎은 또 어떤가. 어떤 것은 하트 모양, 어떤 것은 뫼 산(山) 자 모양이다.
글·사진 제천=민동용 기자 mindy@donga.com